안악 3호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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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무악도 · 대행렬도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북한문화재.
이칭
이칭
동수묘(冬壽墓), 하무덤
정의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무악도 · 대행렬도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북한문화재.
개설

‘동수묘(冬壽墓)’라는 주장도 있다.

19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이 무덤은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板石)으로 짜여진 돌방무덤〔石室墓〕이다.

내용

남쪽인 앞으로부터 널길〔羨道〕·연실(羨室)·앞방〔前室〕·뒷방〔後室 : 主室〕으로 형성되며, 앞방은 좌우에 조그만 옆방〔側室〕이 하나씩 달려 있어 좌우 너비가 커져 있다.

한편, 앞방과 뒷방은 4개의 팔각돌기둥으로 구분되어 서로 투시할 수 있다. 주실 즉, 뒷방은 동벽과 뒷벽의 안쪽에 판석벽(板石壁)과 돌기둥을 각각 세워 회랑부(廻廊部)를 만들고 있다.

각 방의 천장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 공간을 좁히기를 두 번 반복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는 모줄임천장〔抹角藻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모줄임천장이다.

벽화는 벽의 면적 81㎡, 천장의 면적 58㎡나 되는 넓은 널방에 가득차게 그려져 있다. 벽화는 널길벽에 위병(衛兵), 앞방의 동쪽 옆방에 부엌·도살실(屠殺室)·우사(牛舍)·차고(車庫) 등, 서쪽 옆방에 주인공 내외의 좌상(坐像), 앞방 남벽에 무악의장도(舞樂儀仗圖)와 묵서묘지(墨書墓誌), 뒷방 동벽·서벽에 각각 무악도(舞樂圖), 회랑벽에 대행렬도(大行列圖)가 그려져 있다.

결국, 벽화내용은 무악대(舞樂隊)와 장송대(葬送隊)에 둘러싸인 주실 앞에 주인 내외의 초상도(肖像圖)를 모신 혼전(魂殿)과 하인들이 있는 부엌·우사·마구고(馬具庫) 등을 두고 맨 앞은 위병이 지키는 설계이다. 이것은 왕·귀족·대관(大官)들의 생전 주택을 재현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이 무덤에서는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甘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昌黎玄菟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年六十九薨官

이 명문에서 보인 ‘영화십삼년(永和十三年)’은 동진(東晉)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이다. 이는 낙랑 옛 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해 강남의 동진과 연락을 가지고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동수묘의 주인공인 동수는 336년(고국원왕 6)에 랴오둥(遼東)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무장이며, 357년(고국원왕 27)에 죽어서 안악 유순리에 묻힌 것이다.

동수묘의 구조는 여러 점에서 당대의 중국묘 형식을 본받고 있다. 즉, 남북일렬로 여러 방을 배열한 것이나 앞방 좌우에 옆방을 설치한 것은 한대(漢代)의 벽돌무덤〔塼築墳〕의 기본 설계방법이다. 그리고 옆으로 넓어진 앞방에 사각형의 주실을 달아 T자형 평면을 만든 것은 낙랑의 덧널무덤〔木槨墳〕이나 벽돌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다. 또한 큰 판석으로 묘실을 짠 것은 랴오둥반도의 한대 묘에서 볼 수 있다.

이 동수묘에서 처음 보이는 고구려고분의 특색처럼 되어 있는 모줄임천장도 산둥성(山東省) 기남(沂南)의 후한대(後漢代) 돌무덤〔石墓〕에 나타나 있다. 팔각형 돌기둥도 이 기남묘에 있어 기둥 꼭대기에 두공(枓栱)을 얹어 천장석〔天井石〕을 받들게 한 점이 똑같다. 모줄임천장은 원래 근동지방(近東地方)에서 일어난 수법이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3세기에는 이미 중국 본토로 들어와 있던 것이다.

고분벽화 자체도 한대(漢代)에서 시행한 것이다. 특히, 동수묘와 같은 고구려의 전기 고분벽화에서 묘주(墓主)들이 휘장을 친 방 안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랴오둥지방의 고분들과 같다.

의의와 평가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벽화고분인 동수묘는 랴오둥지방에서 넘어온 동수의 무덤이다. 그것은 중국의 한·위진(魏晉)대의 벽화고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실평면·모줄임천장·돌기둥·벽화내용 등 여러 면에서 그 뒤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과정에서 중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안악 제3호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동수 외에도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으로 보는 주장이 북한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동수묘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묵서 자체는 동수에 관한 것으로 인정하지만 묵서가 묘 주인공의 주변이 아닌 장하독(帳下督)의 머리 위에 있기 때문에 동수는 주인공이라기보다 묘지기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안악3호분은 동수가 장하독 생활을 한 고국원왕의 무덤이거나 또는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분에 무덤 축조자의 이름을 쓴 예도 있고 주인공의 묘지 없이 무덤 세운 사람의 묘지만을 적는다는 것도 무리한 억측이기 때문에 북한학계 외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벽화고분』(김기웅, 동화출판공사, 1982)
『한국벽화고분』(김원룡, 일지사, 1974)
「평양학계의 고구려고분 조사연구 성과분석」(강인구, 『북한의 한국학연구성과분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안악 3호분 묵서명에 대한 고찰」(공석구,『역사학보』121, 1990)
「안악3호분 피장자논쟁에 대하여」(김정배, 『고문화』16, 1978)
「안악 제3호 무덤의 피장자에 대하여」(주영헌,『고고민속』2, 1963)
「안악제3호분발굴보고」(황욱·리동성,『유적발굴보고』 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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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안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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