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탐진(耽津: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 자는 자행(子行), 호는 고은(皐隱). 아버지는 찬성 안사종(安士宗)이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1416년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修撰)·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세종 27) 공조참판으로 권제(權踶)·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史筆)의 일로 고신(告身)을 환수당하였다.
1455년(세조 1)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에 복관이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세조가 즉위한 뒤 관작을 주었는데, 그 때 안지의 나이 80세가 넘었는데도 강건하므로 세조가 기뻐하여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시를 지을 때 속된 말을 섞어서 빨리 잘 짓고, 짧은 서간에까지도 거의 시로 말뜻을 이끌어갔다. 또 해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하여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베꼈다. 뒤에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