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은 조선전기 제4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왕자이자 서예가이다. 1418년(세종 즉위)에 태어나 1453년(단종 1)에 사망했다. 시문·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이라 불렸으며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를 짓고 많은 책과 서화 명적들을 수장하여 시회를 열고 서화가를 후원하는 등 당대 서화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황보인·김종서 등 문신들과 제휴, 수양대군측 무신 세력과 맞서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으나 1453년 계유정난으로 대신들이 살해된 뒤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사사되었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안평대군에 봉해지고 이듬해좌부대언(左副大言)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하였다. 1430년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함경도에 육진(六鎭)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다. 고명대신(顧命大臣)이었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문신들과 제휴, 수양대군(首陽大君) 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 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에 관여하는 등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대군은 이의 회복을 위하여 힘썼으나 1453년계유정난으로 황보인·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교동(喬桐)으로 옮겨져 사사되었다. 1747년(영조 23년)영의정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또한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수장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서풍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를 따랐다. 하지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조선 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대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뛰어난 천분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궁중에서 생장하는 과정에서 내부(內府)에 소장된 많은 진적(眞蹟)을 보고 수련하였으며, 그 스스로 서화수장에도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保閑齋集)』「화기(畫記)」에 의하면, 모두 222축의 서화를 수장하였는데, 그 중 안견(安堅)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이었다. 따라서 그와 교유하였던 인사들에게 명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당대의 서화계에 큰 역할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진적으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발문이 대표적이며 법첩에 실린 것과 각첩(刻帖)으로 전하는 것이 적지 않다. 또한 동활자에서 1450년 주조한 경오자가 그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그가 사사(賜死)된 뒤 바로 녹여 을해자를 주조하였기 때문에 전해지는 예가 극히 드물다.
금석문으로는 경기도 여주영릉(英陵)에 있다가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있는 「세종대왕영릉신도비」, 용인의 「청천부원군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의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가 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