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은 조선 전기 「팔준도」, 「몽유도원도」, 「대소가의장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세종 대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대까지도 화원으로 활약했다.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하고 있던 고화들을 섭렵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는 토대로 삼았다. 북송 때의 화원 곽희의 화풍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다른 화풍의 요소를 수용하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까지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산수화에 가장 뛰어났지만 초상·화훼·매죽·노안·누각·말·의장도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세종 때에 도화원(圖畵院)의 종6품 벼슬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遞兒職)인 정4품 호군으로 승진되었다. 이는 조선 초기의 화원으로서 한품(限品)인 종6품의 제한을 깨고 승진한 최초의 예가 된다.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의하면 그는 본성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하였다고 한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고화(古畵)들을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는 토대로 삼았다.
안견의 화풍은 지금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전칭 작품(傳稱作品)인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을 보면 안견이 북송(北宋) 때의 대표적 화원이었던 곽희(郭熙)의 화풍을 토대로 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 다른 화풍의 요소를 수용하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경물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구도상의 특색을 비롯하여 확대 지향적인 공간 개념과 변화가 큰 필법 등에서 한국적인 특징을 짙게 띠고 있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까지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점은 비단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신숙주의 『보한재집』에 있는 화기(畵記)나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산수화에 가장 특출하였다. 하지만 그밖에도 초상(肖像) · 화훼(花卉) · 매죽(梅竹) · 노안(蘆雁) · 누각(樓閣) · 말〔馬〕 · 의장도(儀仗圖)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안견이 남긴 작품은 기록들에 상당수가 보인다. 그 중에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42년에 제작된 「비해당 25세진」, 1443년의 「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 1445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보한재집』에 기록되어 있는 「팔경도(八景圖)」 등 30점이 있다. 1446년과 1447년에 제작된 「팔준도(八駿圖)」, 1447년 이전에 그려진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 1447년에 제작된 「몽유도원도」, 1448년에 그려진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杖圖)」 그리고 1464년에 중국 사신을 위하여 그린 「묵죽도(墨竹圖)」 등도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모두 없어져서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회화사에서는 안견과 그를 추종한 많은 화가들을 합쳐서 안견파라고 지칭한다. 이들의 영향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수묵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