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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제(呂聖齊)

조선시대사인물

 조선후기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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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후기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천(希天), 호는 운포(雲浦). 여순원(呂順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여우길(呂祐吉)이고, 아버지는 부사 여이량(呂爾亮)이다. 어머니는 한효순(韓孝純)의 딸이다. 참판 여이징(呂爾徵)의 양자가 되었다. 인조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아버지 한준겸의 외손자로서 국척 관계(國戚關係)에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아버지가 한백겸(韓百謙)의 문인이었으므로 그 영향을 받았다. 1650년(효종 1) 생원시에 장원하고 1654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같은 해 가을에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되었다. 이후 북평사(北評使)·집의(執義)·동부승지 등을 거쳐 호남을 자세히 살펴 규찰해 유업(儒業)과 무예에 치적이 많았다.
외직에서 돌아와 호조참의·대사간·좌부승지 등을 거쳐, 북도(北道)를 자세히 살펴 규찰했으며, 1678년(숙종 4) 강릉부사에서 예조판서로 특진, 발탁되었다. 1680년 조정에서 보사공신(保社功臣)을 추가로 선정할 때, 공정하지 못한 공신 추록은 여론의 의혹을 더욱 살 것이며, 이사명(李師命)·신범화(申範華) 등의 봉군(封君)을 환수하고 김석익(金錫翼)의 가자(加資)주 01)도 개정해야 한다고 반대 상소를 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좌천되었다.
이듬해 앞서 현종의 국상(國喪) 때 도감(都監)에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의금부사·좌찬성을 역임한 뒤 1684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정가에서 분경(奔競)과 뇌물이 심하자 이를 근절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1688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 해에 왕이 동평군(東平君)을 지나치게 총애하자 박세채(朴世采)와 남구만(南九萬)이 간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유배되었다. 여성제는 이 사건을 구해(救解)주 02)하려다가 경원으로 정배되었다. 그 뒤 곧 용서되어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며, 1689년 좌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여성제는 소론으로, 당시 집권층인 남인과의 의견 충돌로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이 때 남인들이 성혼(成渾)·이이(李珥)를 문묘에서 출향(黜享)주 03)하려 하자 부당함을 진소(陳疏)하였다.
또한 앞서 성혼·이이의 배향시에 춘관(春官)주 04)의 관리로서 관계되었다고 해서 죄를 얻어 양강(楊江)으로 귀향가서 풀려났다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 소식을 듣고 상경해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 때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은 극간하다가 죽고, 여성제와 이상진(李尙眞)만이 끝까지 상소하였다. 이 일이 허사가 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울분으로 1691년 8월에 죽었다. 저서로는 『운포집』이 있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정3품 통정대부 이상으로 올려줌
주02
도와서 화해시킴
주03
배향한 위패를 거둬들임
주04
예조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반윤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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