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형보(瑩甫), 호는 성산(聖山). 이조판서 오팽숙(吳膨叔)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오사운(吳思雲)이다.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등용되어 국가문서를 맡아서 처리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호종(扈從: 따라 다니면서 호위함)보다 직접 적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휘하로 달려가서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싸움에서 아군이 패하게 되자 이듬해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달려갔다.
그 해 8월, 지난 번 그곳에서 참패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총병력으로 공격해오는 왜군과 처절한 혈전을 벌이다가 끝내 성이 무너지려 하자, 판결사 김천일(金千鎰), 동료 고종후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뒤에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