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고구려 평원왕 · 영양왕 대의 장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590년(영양왕 1)
주요 관직
고구려 대형(大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영양왕 대의 장수이다. 『삼국사기』에 「온달전」이 있다. 전통적인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하위 귀족 또는 신흥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평원왕의 공주와 혼인하였고, 그의 후원으로 군사적 능력을 함양하고 군인으로 출세하였다. 평원왕 대 후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대형(大兄) 관등을 받았다. 영양왕 즉위 이후 남한강 유역을 수복하겠다고 자청하여 출정하였다가 아단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 평원왕 · 영양왕 대의 장수.
가계 및 인적 사항

온달(溫達)의 가계(家系)와 출신은 분명하지 않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 시기의 여러 문헌에서 온달은 평양 출신으로 나오나, 『 삼국사기』 「온달전」에 바탕을 둔 이해에 불과하다. 『삼국사기』 「온달전」을 보면 그의 집은 매우 가난해서 걸식(乞食)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온달은 전통적인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다만, 평원왕의 첫째 딸인 평강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에 대형(大兄) 관등을 받았다고 전한다는 점에서 하위 귀족 또는 신흥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온(溫)을 성(姓)으로 보면, 659년 횡산(橫山)에서 당의 설인귀(薛仁貴) 등과 전투하였던 온사문(温沙門)과 같은 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온씨의 시조로 전하고 있다.

주요 활동

온달의 활동은 『삼국사기』 「온달전」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비록 「온달전」은 설화적인 색채가 강하고, 그 원전은 통일신라 이후에 문학 작품의 형태로 정리된 것이었다고 파악되나,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온달전」에 따르면, 온달은 집은 매우 가난해 걸식하고 있었는데, 평원왕의 공주와 혼인하면서 집과 토지, 노비와 우마 및 각종 살림살이를 마련하였고, 국마(國馬)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언덕에서 열리던 수렵대회에 참석해 두각을 나타냈으며, 마침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침범하자 이산(肄山)의 벌판에서 선봉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평원왕의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 관등을 받았다고 한다. 공주의 후원으로 군사적 능력을 함양하고 군인으로 출세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현재 온달이 전공을 세웠다고 한 고구려와 후주의 전쟁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후주는 북주(北周)로 파악되는데, 북주의 무제는 578년 6월 사망하였고, 이때까지 고구려와 북주는 국경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577년 전반까지 고구려의 서방 변경이었던 요서(遼西) 지역에는 북제(北齊)의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고, 580년대 전반까지는 북제의 영주자사(營州刺史)였던 고보령(高寶寜)이 돌궐(突厥)의 지원을 받으면서 북주와 대립하고 있었다.

국제 정세로 보아 북주가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였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삼국사기』 「온달전」에 보이는 고구려와 후주의 전쟁은 고구려와 고보령 세력의 대립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고, 고구려가 고보령 세력을 지원하면서 북주와 대립한 것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온달은 영양왕 대까지 활동하였다. 온달은 영양왕이 즉위하자 출정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빼앗아 간 한강 이북의 영역을 되찾아오겠다고 한 것이다. 온달은 출정에 앞서 계립현(鷄立峴) ·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되찾아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온달이 수복하고자 한 한강 이북의 영역이란 구체적으로 지금의 남한강 유역으로 파악된다. 6세기 중반 신라와 백제 연합군의 북진으로 상실한 영역이었다.

온달은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온달이 전사하였다고 한 아단성의 위치는 논란이 있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으로 보기도 하고,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는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고구려와 신라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북부에서 대립하였다는 점을 중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603년 고구려의 신라 북한산성 공격과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는 「온달전」에서 남한강 유역이 강조되었고, 남한강 상류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남진하였을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온달의 출정과 전사는 한강 유역 수복을 추구하였던 6세기 후반 고구려 사회의 지향이 투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참고문헌

원전

『북제서(北齊書)』
『삼국사기(三國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단행본

김진한,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
장창은, 『삼국시대 전쟁과 국경』(온샘, 2020)
이정빈, 『고구려-수 전쟁-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대전』(주류성, 2018)
정호섭, 『고구려사와 역사인식』(새문사, 2016)
장창은, 『고구려 남방 진출사』(경인문화사, 2014)
이도학,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광개토왕릉비문을 통한 고구려사』(서경, 2006)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한나래, 2004)
이기백, 『한국고대정치사회사연구』(일조각, 1996)

논문

윤성호, 「『三國史記』 溫達傳 所載 阿旦城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韓國史學報』 66, 고려사학회, 2017)
박인호, 「溫達을 통해 본 6世紀 高句麗 貴族社會」(『韓國古代史硏究』 36, 한국고대사학회, 2004)
여호규,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역사와 현실』 46, 한국역사연구회, 2002)
임기환, 「온달 · 서동설화와 6세기 사회」(『역사비평』 22, 역사문제연구소, 199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