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성 ()

서울 아차산성 동남벽 전경
서울 아차산성 동남벽 전경
건축
유적
국가유산
7세기경, 신라가 축조한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 남단에 있는 둘레 1km의 포곡식 석축 산성. 북한산성(北漢山城).
이칭
이칭
장한성(長漢城), 양진성(楊津城), 광진고산성(廣津古山城), 북한산성(北漢山城)
유적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백제
관련 인물
개로왕
둘레
1km
면적
103,37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차산성(阿且山城))]
소재지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산16-46번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73년05월25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산16-46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 남단에 있는 둘레 1km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발굴 조사 결과, 아차산성은 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적힌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 진평왕 대인 604년에 재설치된 신라 북한산주(北漢山州)의 치소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차산성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한 아차성(阿且城), 고구려 온달 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아단성(阿旦城) 등으로 알려졌으나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정의
7세기경, 신라가 축조한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 남단에 있는 둘레 1km의 포곡식 석축 산성. 북한산성(北漢山城).
발굴경위 및 결과

아차산성(阿且山城)에 대한 최초의 학술 조사는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실시한 아차산 일대의 지표조사이다. 당시 아차산성의 구조와 규모, 시설물에 대한 기초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1996년 산성의 서북쪽 장대지(將臺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구간에 대한 보수 공사 과정에서 원성벽이 노출되어 1997년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가 이를 수습 발굴 조사했고, 이어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실측 조사를 진행하였다. 1999년에는 성벽의 구조 및 성의 축조 방식을 파악하기 위해 서울대학교박물관이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현재의 석축 성벽은 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밖에도 성내에서 대형 초석 건물지(建物址)를 비롯하여 연못 등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후 한국고고환경연구소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남벽과 내부 공간에 대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남벽에서는 외벽의 보축(補築) 성벽과 출수구, 내벽의 입수구, 안쪽의 집수지, 도수로, 구들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동일한 시기에 한강문화재연구원이 북쪽 장대지와 서벽 및 그 일대의 평탄지(平坦地)를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장대지 전체가 신라가 축조한 대형 치(雉)임을 확인하였다. 평탄지에서는 10기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1호 기단 건물지는 9세기에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건립경위

6세기 중반 이후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그 일대를 다스리기 위해 한강 이남에는 남한산성인 이성산성을, 한강 북안에는 북한산성인 아차산성을 축조하였다. 다만 진흥왕 때 신라의 주치는 한강 이남의 한성이었을 것이고, 진평왕 대부터는 북한산에 신라의 주치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발굴 조사 결과 아차산성은 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는 명문(明文)기와를 통해 진평왕대에 개칭된 북한산주(北漢山州)의 치소(治所)로 활용된 곳임을 알 수 있다.

변천

아차산성은 신라가 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하여 10세기 전반까지 사용하였으며, 그 사이 두 차례의 수축과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차 개축은 7세기 후반 나당전쟁(羅唐戰爭) 시기에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2차 개축은 명문기와를 포함해 다량의 기와 건물지가 들어선 9세기대로 추정된다.

한편, 아차산성은 『고려사(高麗史)』『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장한성(長漢城)으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양진성(楊津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자료에는 광진고산성(廣津古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태와 특징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 능선의 남쪽 사면에 조성된 아차산성은 육각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의 포곡식(包谷式) 석축 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1,043m이다. 해발 203m로 산성의 가장 높은 곳인 북서쪽 일대는 성벽이 회절하는 곡성부로 대형 치가 조성되었다. 해발 122m로 가장 낮은 남쪽 일대는 계곡부로 집수 시설과 함께 물이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성벽에 배수구가 갖추어져 있다.

성벽은 기반토를 고른 후 다듬어진 석재로 면과 열을 맞추어 쌓았는데, 협축식과 내탁식이 모두 확인된다. 산성은 크게 두 차례 이상의 수축과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성벽의 경우 초축 성벽은 '품(品)'자형의 바른층쌓기로 축조하였다. 이후 성벽을 지지하기 위한 보축 성벽을 추가하기 위해 한 두 차례의 수 · 개축을 한 사실이 확인된다. 보축 성벽의 높이는 0.7~2.2m이며, 체성(体城)벽 쪽으로 '품(品)'자형으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장대지는 아차산성에서 가장 높은 북서쪽 구릉에 있다. 이곳에는 원래 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약 3m 너비로 층층이 다진 토축부와 함께 제3치를 추가하여 외성벽의 규모를 확장했다. 또한 내성벽에는 방대형(方臺型) 시설을 갖추는 등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다음 장대를 조성하였다. 제3치와 방대형 시설 측벽에서는 '수직 기둥 홈'이 확인된다.

남벽의 집수 시설은 체성벽에서 약 15m 떨어진 계곡부 중앙에 있다. 집수 시설의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이며 길이는 712m 가량이다. 벽체는 2090cm 크기의 석재로 쌓아올렸다. 집수 시설의 주요 목적은 물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속을 감속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지는 남벽에서는 성벽 밖으로 물을 배출하는 배수구 3기가 확인되었다. 배수구는 삼각형에 가까운 사다리꼴인데, 배수구의 이러한 형태는 신라의 다른 석축 산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성 내부에서 석축 우물과 함께 여러 기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건물지는 기단과 초석을 갖춘 건물지, 구들과 기둥 자리가 있는 건물지로 구분할 수 있다.

성내에서는 6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에 사용된 토기류, 자기류, 기와류, 금속기류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토기류로는 삼각집선문 뚜껑을 비롯하여 단각고배, 점열문입자형뚜껑, 대부완, 편병, 줄무늬병 등이 출토되었다.

의의 및 평가

아차산 능선의 남쪽 사면에 조성된 아차산성은 신라가 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한 둘레 1km 가량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과거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백제 책계왕 원년(286) 고구려의 침입을 경계하여 수축하였다는 아단성(阿旦城), 고구려의 장수왕이 475년 백제의 한성(漢城)을 점령하였을 때 개로왕을 죽인 장소로 기록된 아차성(阿且城) 등으로 추정하였다. 아단성은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아직까지 아차산성에서 백제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으며, 산성에서 확인되는 여러 유구와 유물들은 6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것들 뿐이다. 따라서 아차산성은 산성에서 출토된 ‘북한산성(北漢山城)’ 명문 기와를 통해 신라 진평왕 대에 설치된 북한산주(北漢山州)의 치소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단행본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아차산성-남벽 및 배구수-』(2020)
한강문화재연구원, 『아차산성-장대지 일대 유적-』(2020)
서울대학교 박물관, 『아차산성-시굴조사보고서-』(2000)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아차산성 '96보수구간내 실측 및 수습발굴 조사보고서』(1998)
구리문화원,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1994)
집필자
양시은(충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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