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정북동 토성은 국가 사적으로,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평면 형태 방형의 판축 토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75m이다. 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인근의 평야에 조성되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토성 가운데서도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정북동 토성에 대한 그간 몇 차례의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성벽에 대한 절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토성의 축조 시기와 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현재 해자에 대한 발굴 조사가 완료되어 복원되었다.
미호천변 평야에 위치한 정북동 토성은 1975년 처음 소개된 이후, 1990년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 사적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1997년에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가 1차 발굴 조사를 하였다. 당시 조사단은 성벽이 원삼국시대 문화층 위에 만들어졌고, 기단 보축 석렬이 없는 순수 판축 토루라는 점에서 삼국시대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1999년에는 동일 기관이 2차 조사를 하였는데, 동문지와 남문지의 성벽 안쪽 구간과 남동 모서리 성벽 바깥쪽에 대한 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삼국시대 주거지, 그리고 해자 등이 확인되었다. 3차 조사는 중원문화재연구원(현, 국립중원문화유산연구소)에서 2010년과 2011년에 북문지와 3열로 이루어진 바깥 해자(외황)를 대상으로 하였다. 4차 조사는 토성 외곽의 전체 해자를 대상으로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실시하였다. 그 결과 해자는 초축 당시 1열로 조성되었는데, 성벽에 치와 같은 구조물이 들어서면서 폐기되고 다시 2열로 재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5차 조사는 2018년에 서원문화재연구원에서 성벽 북서 모서리 바깥쪽 일부 구간을 조사하면서 해자 일부를 확인한 바 있다. 6차 조사는 2020년 충북대학교박물관이 성 내부의 북쪽 구역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교란이 심하여 별다른 유구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정북동 토성은 그간 몇 차례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축조 시기를 판단할 만한 명확한 근거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토성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을 당시에는 한성기 백제 토성으로 알려졌으나, 그 이후 기존에 조사된 백제 문화층과 주거지는 7세기를 전후한 신라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백제 문화층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해당 문화층 위에 조성된 성벽 역시 백제 성벽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반면 최근에는 성벽의 축조 기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의 판축 토성과는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백제 한성기 토성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다시 제기된 바 있다. 이에 정북동 토성의 축조 시기는 백제 한성기 혹은 통일신라로 그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문제는 토성 주변으로 관련 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삼국시대에서 백제에 해당하는 청주 송절동유적(테크노폴리스 사업 부지)과 동떨어진 곳에 토성이 자리하고 있고, 또 신라의 서원소경이 있는 청주 시내와도 떨어진 곳이라는 점에서 토성의 건립 경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한편, 1744년 승려 영휴가 작성한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양길이 군사를 나누어 동쪽을 공략할 때에 지금의 상당산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삼아 살았다. 후에 자칭 후백제의 견훤이 방에 성을 넘어 그 성을 빼앗았다. 서문 옆 까치내에는 토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세금을 거두어 쌓아 두었다가 상당산성 안으로 운반해 들였다.’라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정북동 토성을 후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청주 정북동 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지점의 미호천변 평야에 조성된 평면 형태 방형의 판축 토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75m로, 현존하는 토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토성은 고대 중국의 방형 토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으며, 그간 동문지와 서문지, 북문지 일원, 성벽 일부와 해자, 성 내부(북쪽) 구간에 대한 발굴 조사가 있었다.
토성은 판축 토루인 성벽과 성 밖의 해자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외부에 12개의 치가 추가되었으며, 남문지와 북문지는 어긋문 구조로, 동문지와 서문지는 일직선상에 마주 보고 있는 형태이다. 해자는 성벽이 처음 축조될 당시에는 성벽 외측에 인접하여 축조되었는데, 이후 성벽이 개축되는 과정에서 이를 폐기하고 2열로 재조성하였다. 내측 해자는 너비가 917m, 최대 깊이 1.6m, 외측 해자는 3.55m 가량이다.
동문지 북측 성벽 조사에 따르면, 성벽은 판축하여 축조한 단면 사다리꼴의 중심 토루와 그 내외 양측에 덧붙여 축조한 내외피 판축 토루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 토루는 다시 3개의 판축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심 토루의 규모는 밑변 너비 6.2m, 현존 높이 3.6m 가량이다. 중심 토루와 내,외피 토루에는 판축을 위한 목주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전체 규모는 기저부 너비 14.4m, 현존 높이는 3.9m 가량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청주 정북동 토성은 현존하는 평지 토성 중 그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여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온 유적이다. 토성은 그 주변으로 접근을 제한하기 위해 해자가 조성되었으며, 이후 성벽에 방어를 위한 치를 추가하는 과정에서 해자 역시 2열로 재조성되었다. 토성의 내부는 기존에 자리하였던 마을로 인해 상당 부분 훼손되어 그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조사된 성벽의 조사 내용을 토대로 축조 시기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토성의 축조와 관련한 유물이나 유구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아 관련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한편, 『상당산성고금사적기』의 발견으로 토성의 조성 연대를 통일신라에서 후삼국시대로 판단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연구자들은 삼국시대 토성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토성의 주변에 관련 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토성의 건립 목적과 연계하여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며, 앞으로도 추가 조사와 연구를 통해 정북동 토성의 축조 시기와 운영 주체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