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대모산성 ( )

양주 대모산성
양주 대모산성
건축
유적
국가유산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에서 축조하여 통일신라시대까지 활용한 신라의 테뫼식 석축 산성.
유적
건립 시기
삼국시대(6세기 중반 이후)
관련 국가
신라
둘레
726m
면적
57,742㎡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789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2013년6월21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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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양주 대모산성(楊州 大母山城)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반 이후 임진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축조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이 산성은 연천 대전리산성과 함께 나당전쟁의 중요 격전지였던 매소성과 비교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과 관련 구조물, 집수지 등에서 여러 차례 산성을 개축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까지 산성을 지속적으로 활용했음이 밝혀졌다. 다만 일부 확인되는 백제 유구와 유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계속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정의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에서 축조하여 통일신라시대까지 활용한 신라의 테뫼식 석축 산성.
발굴경위 및 결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양주 대모산성(楊州 大母山城)은 비교적 일찍부터 발굴 조사(發掘調査)가 진행된 곳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가 1980년부터 매년 공동으로 3차에 걸쳐 북문지 일대의 성벽과 건물지를 발굴 조사하였다. 1983년과 1984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단독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4차 조사에서는 산성 내 정상부 일대의 건물지를, 5차 조사에서는 남문지 안쪽 건물지를 대상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1995년에는 한림대학교 박물관에서 동문지 일대를 발굴 조사하였으며, 1998년에는 서문지 일대를 발굴 조사하였다.

2013년 양주 대모산성은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2016년에 종합정비계획이 수립되었다. 이후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기호문화재연구원(현, 기호문화유산연구원)이 2018년에 장대지(將台址) 하단 경사면의 건물지와 서문지 일대의 건물지를 발굴 조사하였으며, 2019년에는 동문지와 서문지 주변의 건물지와 집수지(集水地)를 발굴 조사하였다. 그리고 2020년(10차)에는 동문지 주변과 서문지 일대의 성벽과 관련 유구들을 발굴 조사하였다. 이후 기호문화재연구원은 2021년과 2022년에도 11차와 12차에 걸친 연차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건립경위

발굴 조사 결과, 양주 대모산성에서는 신라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성벽의 기본 축조 기법과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양주 대모산성은 6세기 중반 이후 한강 유역을 점령한 신라가 임진강 남안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변천

양주 대모산성의 성벽과 성 내부의 집수지에서 산성을 수축(修築)하고 개축(改築)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유물 역시 신라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것들이 출토되어 6세기 중반 이후에 신라가 산성을 축조한 후 통일신라시대까지 지속해서 활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는 대모산성을 고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조선 초기 이전에 폐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와 특징

양주 대모산성은 한강과 임진강 유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자리한 대모산(해발 212m)의 정상부에 축성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726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모산성은 서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석축이다. 둘레는 9백 6척이고, 높이는 5척이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성벽은 체성벽(體城壁)을 축조한 후 보축 성벽과 치(雉)를 덧대는 순서로 축조되었다. 보축 성벽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를 다듬어 석재 사이에 틈이 없도록 정교하게 쌓았는데, 일부 구간에서는 장방형(長方形) 또는 방형(方形)의 석재로 바른층쌓기를 한 곳도 확인된다. 보축 성벽은 성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는 단면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체성벽에 덧붙였다. 문지는 북문지 · 서문지 · 동문지 3개소로 모두 개구부(開口部)가 성벽 중간에 ‘요(凹)’자형으로 만들어진 현문의 형태이다.

성내에서는 석벽 건물지, 주거지, 수혈, 석축 집수 시설(集水施設)과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집수지는 시기를 달리하며 개축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대모산 일대에서 가장 저지대에 있는 서문지 주변 계곡부 일대에서 개축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산성 내에서는 토기, 기와, 철기, 청동기, 석기, 목기, 골각패갑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의 기종은 주로 호, 뚜껑, 완, 대부완, 병, 고배(高杯) 등이며, 인화문토기(印花紋土器)도 포함되어 있다. 9차 조사에서는 얼굴 모양의 토제품도 출토되어 산성 내에서 일종의 의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와는 주로 선문, 집선문, 격자문, 어골문 등의 문양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것들이 많다. 명문(明文) 기와도 다수 확인되는데, ‘덕부(德部)’ · ‘덕부사(德部舍)’ · ‘관(官)’ · ‘국(國)’ · ‘부부(富部)’ · ‘대부운사(大浮雲寺)’ 등이 대표적이다. 막새의 경우 연화문 와당을 비롯하여 당초문 암막새 등이 확인되었다.

한편, 양주 대모산성 내의 일부 집수 시설과 주거지, 수혈 등에서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 해당 유구에서 수습한 목탄 시료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도 한성기 백제의 것으로 확인되어 주목을 받았다. 그렇지만 현재 남아 있는 양주 대모산성의 석축 성벽은 그 축조 기법과 구조 등으로 볼 때 신라에서 축성한 것이 분명하므로, 대모산성이 한성기 백제의 관방 유적일 것이라는 시각은 다른 관점에서 연구를 지속해 볼 필요가 있다.

의의 및 평가

양주 대모산성은 한강과 임진강 유역을 연결하는 고대의 교통로인 장단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였다. 따라서 신라가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에 산성을 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연천 대전리산성과 함께 나당전쟁의 중요 격전지인 매소성(買肖城)으로 비교될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6세기 중엽에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이후 임진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대모산성을 축성하였음이 밝혀졌다. 양주 대모산성은 통일신라시대까지 꾸준히 활용되면서 여러 차례 보수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 성곽의 축조 기술과 변화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기호문화재연구원, 『양주 대모산성 발굴조사-8 · 9차 발굴조사 보고서 합본-』(2021)
한림대학교박물관, 『양주 대모산성-동문지 · 서문지-』(2002)
문화재연구소 · 한림대학교박물관, 『양주대모산성-발굴보고서-』(1990)

논문

여성민, 「양주 대모산성 발굴조사 현황과 성과」(『선사와 고대』 64, 2020)
집필자
양시은(충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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