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천 고성지 (서울 )

서울 양천고성지
서울 양천고성지
건축
유적
문화재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한 테뫼식 석축 산성.
유적
건립 시기
고대(6세기 중반~8세기)
관련 국가
신라
둘레
380m
면적
29,752㎡
소재지
서울 강서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92년 03월 10일 지정)
소재지
서울 강서구
내용 요약

서울 양천 고성지는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쌓은 둘레 380m 가량의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산성은 한강변에 접한 얕은 구릉인 궁산(해발 74.3m) 정상부를 둘러싸고 축조되었는데, 일제강점기와 근대에 군 기지로 사용되면서 유적이 많이 훼손되었다. 당초 삼국시대의 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축조 기법이나 성벽을 조성할 당시의 토층에서 수습된 목탄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 그리고 출토 토기 및 기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신라가 쌓은 성이 분명하다.

키워드
정의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한 테뫼식 석축 산성.
발굴 경위 및 결과

사적 제372호로 지정되어 있는 양천 고성은 강서구청에서 2009년에 정비 복원 계획을 수립하면서 성벽 구간에 대한 발굴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관련 조사가 이루어졌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한얼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5차에 걸쳐 성벽을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1차와 2차 조사는 남측 성벽에 대한 것으로 성벽의 몸체 부분과 주1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3차 조사는 서측 성벽을 대상으로 하였다. 4차 조사는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내부 건물지를 확인하는 시굴 조사와 함께 서쪽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회절 구간에 대한 성벽 조사가 이루어졌다. 5차 조사는 북쪽 치성 및 주6 성벽에 대한 확인 및 동측 성벽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건립 경위

5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양천 고성을 처음 축조한 세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초축 당시부터 돌로 성벽을 쌓았고, 성벽 내부에서 수습된 목탄을 대상으로 측정한 방사성 탄소 연대 결과값과 성 내부에서 출토된 기와와 토기의 양상을 종합해 볼 때, 양천 고성은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변천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상 양천 고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1차례 이상 고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2개의 주2가 추가되었는데, 축조 기법과 출토 유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때 개축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성에서는 어골문 기와도 출토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성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성산(城山)이 현의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그리고 "성산고성(城山古城) 석축이며 둘레는 7백 26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전하고 있어,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폐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해방 직후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유적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형태와 특징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일원 한강변에 접한 얕은 구릉인 궁산(해발 74.3m)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성벽의 전체 둘레는 380m 가량이다. 치는 북벽과 남벽에 각각 1개씩 존재한다. 성벽은 내탁식(편축식)으로 축조하였는데, 훼손이 심하여 2단에서 최대 9단까지만 확인된다. 성벽의 기저부에는 기단석이 위치할 부분을 굴광하여 기단석이 외부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턱을 조성하였다. 기단부에는 주3과 점토, 기와를 섞어 기단 보축을 하였는데, 해당 시설은 수축 시점(修築)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서벽과 북벽 일대는 성벽의 몸체 부분의 붕괴로 인해 후대 수축이 이루어졌는데, 북벽 일대에는 보축 성벽도 확인되나 잔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북쪽 치는 성벽의 몸체 부분이 붕괴된 후 수축하면서 덧붙인 것으로, 기저부에 큰 장대석을 놓고 다듬은 할석들을 위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성에서 출토되는 기와는 주로 격자문과 주4 계통이며, 토기 중에는 8세기 대로 편년되는 주5 토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벽의 몸체 부분 내부 뒷채움토에서 수습한 목탄을 대상으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실시한 결과 대체로 6세기 중엽에서 8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다양한 연대값이 도출되었다.

이상의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양천 고성은 신라가 553년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어느 시점에 들어 서해에서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수상 교통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 및 평가

한강변에 위치한 양천 고성은 그 위치상 서해에서 한강을 통해 서울 지역으로 들어오는 수상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축조된 고대 성곽으로 판단된다. 유적의 훼손이 심하고 기존 발굴 조사가 성벽 중심으로만 이루어져 향후 조사 결과에 따라 그 내용이 바뀔 수도 있으나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양천 고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원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서울 양천고성지』(한얼문화유산연구원, 2016)
『서울 양천고성지Ⅱ』(한얼문화유산연구원, 2019)

논문

장정수, 「양천고성의 변천과정 연구」(대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주석
주1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2

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 성벽을 앞이나 옆에서 보호하는 구조물로서, 그 위에 성가퀴를 쌓았다. 우리말샘

주3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4

줄로 이루어진 무늬. 우리말샘

주5

도자기를 만들 때에, 도장 따위의 도구로 눌러 찍은 무늬. 우리말샘

주6

건물이나 구조물 따위의 기본적인 것에 일부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지음. 우리말샘

집필자
양시은(충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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