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산성(黃龍山城)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16년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처음 실시하였다. 이후 1960년대와 1980년대 초에 북한의 현지 연구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관련된 발굴 조사 보고서는 지금까지 발간되지 않았다.
고려 초기인 919년(태조 2)에 1,807칸(間) 규모의 성벽과 문(門) 6개, 수구(水口) 1개를 가진 성을 용강현(龍岡縣)에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당시 황룡산성을 중수(重修)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1676년(숙종 2)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민종도(閔宗道)가 바닷가 여섯 고을의 백성들이 대피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자는 청을 올려 황룡산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한편 용강현(龍岡縣)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황룡국(黃龍國)이었다가 고구려에 합병된 곳으로, 오석산의 (황룡)산성은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현재 황룡산성은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산성은 평안남도 남포특별시 용강군 옥도리 오석산의 남쪽 계곡을 끼고 주변 산봉우리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석축 산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6,600m에 달한다. 산세가 험하거나 절벽인 곳은 돌을 별도로 쌓지 않고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였다. 산 능선에는 내탁식(內托式) 성벽이 축조되었으며, 잔고는 4~5m이다. 남쪽 계곡부와 지형이 비교적 낮은 북쪽 사면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쌓았다. 성벽 기저부의 너비는 6~8m, 잔고는 10~11m이다. 성벽은 쐐기꼴의 돌을 이용하여 겉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황룡산성에는 각 방향마다 문지가 확인된다. 계곡부에 있는 남문이 정문이며, 물을 흘려보내는 수구(水口)도 남아 있다. 남문은 홍예문(虹霓門) 구조에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으나 이는 후대에 개축(改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벽과 서벽에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쉽도록 'ㄷ'자 형태로 들여서 낸 4개의 치(雉)가 남아 있다. 남쪽 치의 규모는 길이 8m, 너비 5.5m이다. 동, 서, 남, 북의 각 봉우리에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장대(將臺) 터가 남아 있는데, 북장대에서는 봉수터도 발견되었다.
성에는 수원이 풍부하여 여러 곳에서 저수 시설이 발견되었다. 현재도 8개의 큰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고 한다. 성내에서 붉은색 계통의 고구려 기와가 다수 발견되었으며, 산성 주변에는 수백 기의 고구려 석실분이 분포하고 있다.
황룡산성은 평양에서 서쪽으로 44km 떨어진 남포특별시 용강군의 오석산에 있는 둘레 6,600m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이곳에서는 서해를 비롯한 남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황룡산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그런데 성벽을 축조한 방식이나 성 내부에서 수습된 고구려 유물들로 보아 이 산성은 고구려가 초축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성의 규모와 위치뿐 아니라 고구려 기와가 다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당시 남포 일대를 관장하던 행정 관청이 황룡산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수도였던 평양성으로 향하는 수로와 육로의 교통로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산성이 있다는 점에서 황룡산성은 평양성을 방어하는 서쪽 방어망의 주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