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단양(丹陽). 증조는 전리정랑(典理正郎)으로 증 문하시중(贈門下侍中)인 우천석(禹天錫)이고, 조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우팽(禹伻)이다. 아버지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증 문하시중인 우복생(禹福生)이며, 어머니는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진주유씨(晋州柳氏)이다. 형은 우인열(禹仁烈)이다.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갔다. 1408년(태종 8)에 민무구(閔無咎)사건에 관련되어 하옥되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났으며, 이듬해 3월에는 제언(堤堰) 수축을 통한 수리의 개발을 주장하여 태종대의 수리시설 확장사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413년에는 충청도 도관찰사의 직임을 띠고 조운(漕運)의 편의를 위하여 시도된 태안반도 운하개통사업, 즉 축제(築堤: 제방을 쌓는 일)사업을 주관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경기·충청 양도의 권과농상사(勸課農桑使)로 나가 제언수축과 식상(植桑: 뽕나무를 심음)의 일을 권장하였다.
1415년에 다시 충청도관찰사, 같은 해 말에 경기도관찰사에 이어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가 되었다. 1418년 판청주목사로 있을 때 전국 각지에 제방과 관개시설의 목록을 갖추어 매년 수치하게 하고, 경차관을 보내어 감독하게 하자는 건의를 올려 이를 실현시켰다. 김제 벽골제(碧骨堤), 부평 수용제(水桶堤) 등의 수축에 큰 공을 세웠으며 농업전문가로서의 활약이 컸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