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39만 6,498㎡. 남서동은 울릉도의 성인봉 서사면에 위치하고, 고분들은 성인봉의 주능선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지릉 사이의 계곡에 분포하고 있다.
1957년 국립박물관에 의한 조사에서는 번호 부여가 가능할 정도로 확실하게 인식되는 고분이 32기, 흔적이 남아 있는 고분이 모두 5기로 모두 37기의 고분이 분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경작 등으로 대부분 훼손되고 15기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고분들은 2개의 군집으로 나뉘어 마을이 자리잡은 주계곡과 그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계곡에 있다. 국립박물관의 조사에서는 38기 중 원형이 남아 있던 7기의 고분에 대한 실측을 비롯한 정식조사가 행해졌다.
조사된 고분은 경사지에 자리잡아 앞면은 돌로 축대를 쌓고, 뒷면은 지면을 파서 편평하게 한 다음, 앞트기식[橫口式]의 돌덧널[石槨]을 구축하고 돌무지로 분구를 축조한 돌무지무덤[積石塚]이다.
분구의 크기는 대체로 직경 7∼14m, 높이 3∼6m이며, 평면형태가 타원형으로 울릉도의 다른 지역 고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지역의 것들에 비해 돌덧널의 높이가 비교적 높고, 모두 계곡을 향한 쪽에 입구를 둔 특징이 있다.
조사된 고분 중 가장 대표적인 제11호분의 현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근의 자연석을 쌓아 약 1.5m의 기단(基段)을 만들고 앞면에 광장과 같은 공간을 두고, 위에 다시 2∼3단을 더 쌓아 돌덧널의 바닥으로 삼았다. 돌덧널은 길이 9m 이상, 최대 너비 1.6m, 높이 1.5m인 중앙의 배가 부른 장방형으로 천정은 판석 10매를 횡가하였다.
벽은 위로 올라가며 좁게 쌓았고 서쪽을 입구로 하였다. 조사된 고분의 유물은 모두 도굴되고 제11호분에서만 신라토기조각과 승문(繩文)이 타날(打捺)된 토기조각 몇 점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가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이므로 울릉도에서 이러한 형식의 다른 고분들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분의 규모나 장기간에 거친 시기의 고분 수가 비교적 적은 수량임으로 무덤의 피장자는 당시 울릉도의 지배계급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