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물기략(名物紀略)』에 의하면 유밀과는 본디 제사에 과실 대신 쓰기 위하여 밀가루와 꿀을 반죽하여, 대추 · 밤 · 배 · 감과 같은 과실 모양으로 만들어서 기름에 지진 가과(假果 : 헛열매)라 한다. 유밀과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극히 성행하였고 원나라에까지 유명하였다. 1296년(충렬왕 22)에 왕이 세자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갈 때에 유밀과를 가져가서 잔치에 차렸더니 입속에서 슬슬 녹는 듯하다고 하여 칭송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 유밀과가 발달한 것은 불교와 관계가 깊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고 있으므로 제사에 어육(魚肉)을 피하고 유밀과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유밀과는 제사뿐 아니라 연등회 · 팔관회와 같은 연회와 공사 연회와 재연(齋宴; 법회와 잔치), 왕의 행차 · 혼례 등에까지 쓰이게 되었다. 그 결과 곡물 · 꿀 · 기름 등의 소비가 많아져 물가가 오르고, 민생이 어려워지는 부작용을 빚기도 하였다. 따라서 유밀과의 사용을 금지하는 금령도 여러 차례 있었다. 『고려사』 「형법(刑法)」 금령에 의하면 1192년(명종 22)에 유밀과 대신 나무열매를 쓰도록 하는 영이 내려졌으며, 1353년(공민왕 2)에도 유밀과의 사용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억불숭유정책의 결과로 어육과 제찬이 늘었으나, 여전히 유밀과는 중요한 과품으로 사용되었다.
유밀과는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모지고 크게 만든 것은 모약과, 다식판에 박은 것은 다식과, 만두 모양으로 만든 것은 만두과, 약과판에 박은 것은 약과라 하며, 이밖에 대약과 · 소약과 · 매자과 · 차수과 · 연약과 · 요화과 · 채소과 등이 있다. 이들은 용도에 따라 각기 쓰였다. 고배상에는 대약과, 반과상(飯果床)이나 다과상에는 크기가 작은 다식과가 쓰였다. 대약과를 높이 고배한 위에는 만두과가 웃기로 놓였다. 또, 소약과 · 다식과 · 만두과는 평상시에 쓰였고, 제상에는 모약과가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