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牙山) 출생으로,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해위(海葦)이다. 사업가이자 개화파 기독교인인 아버지 윤치소(尹致昭)와 어머니 이범숙(李範淑) 사이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야(東野) 윤치소는 1911년 한국인 공업회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경성직뉴 주식회사를 운영한 사업가였으며, 안동(安洞, 오늘날의 서울 안국동)교회 장로였다. 윤치소는 1920∼30년대 일제하에서 국채보상운동, 국산품장려운동, 조선교육회, 임시정부 후원단체 참여 등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윤치소의 막대한 재산은 훗날 아들 윤보선의 독립자금과 민주화운동 자금으로 쓰였다. 윤치소의 사촌형이자 윤보선의 당숙(堂叔)은 구한말 개화사상가 윤치호(尹致昊)이다.
윤보선은 어릴 때부터 민족적이며 근대화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특히 아버지가 안동교회 장로였고, 당숙 윤치호가 한국 기독교계의 거목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자연스럽게 미국 선교사들과의 접촉도 잦았다. 훗날 그의 기독교적 구국론(救國論)은 그러한 가풍(家風)에서 비롯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신항리에서 태어난 윤보선은 한동안 부친이 살던 서울 교동 집과 충남 아산의 고향집을 오가며 조부(祖父) 윤영렬(尹英烈)과 한학자들로부터 한문(漢文)과 유학(儒學)을 배웠다. 그러다가 10세 때인 1907년, 관립(官立) 한성고등소학교(현재 교동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3세가 되던 1910년에는 서울 진고개(현재 충무로)에 있는 일본인 전용학교인 닛슈즈(日出)소학교 5학년에 편입해 2년 뒤 졸업하였다.
1910년부터 YMCA에 출입하였는데, 그곳에서 YMCA 간사로 활동하던 이승만(李承晩)과 처음 교분을 맺었고, 당시 YMCA를 주도하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와 친분을 쌓았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13년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 입학하였으나 두 학기 만에 그만두었고, 다시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지만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퇴하였다. 1915년, 18세에 민영환(閔泳煥)의 6촌이었던 민영철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해 12월에는 첫 딸을 낳았다. 결혼 후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 방식의 독립운동을 꿈꾸던 윤보선은 20세가 되던 1917년 여름, 상해(上海) 교민단장으로 활동하다가 잠시 귀국한 여운형(呂運亨)을 만나 임신한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중국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 도착해 이미 그곳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던 신규식(申圭植)을 만나 1921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4년 동안 그의 집에 머물렀다. 신규식은 이때 윤보선에게 ‘바다갈대’라는 의미의 ‘해위(海葦)’라는 호(號)를 지어주었는데, 바닷가의 갈대처럼 약해 보이지만 억센 파도에도 꺾이지 않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의미였다. 이때 신규식은 윤보선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국내외 독립운동과 영국 유학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0년 3월 13일 윤보선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당시 윤보선이 23세였다. 윤보선은 1920년 신규식이 독립운동을 위해 창간한 주간지 『진단』의 발간작업을 돕는 한편, 1921년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일본에 밀입국해 독립운동자금 3,000원을 마련해오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0년 들어 임시정부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고 재정문제가 심각해지자 신규식 · 신익희 등은 윤보선을 미래의 지도자로 육성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의회정치가 발달한 영국으로 해외 유학을 권유하였고, 윤보선은 상해 생활 3년만인 1921년 6월 영국으로 떠났다. 1925년, 이미 영국에 유학 중이던 당숙(堂叔) 윤치왕(尹致旺)의 도움을 받아 스코틀랜드 소재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데 이어 우드부룩 칼리지(Woodbrooke College)에서 1년간 공부하였으며, 옥스퍼드 대학(Oxford University)에서도 3개월간 영어와 라틴어, 희랍어 등을 공부하였다. 1927년, 윤보선은 에든버러 대학(University of Edinburgh) 고고학과에 입학해 6년만인 1930년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하며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에도 2년 동안 영국에 머물며 유럽을 여행하던 윤보선은 국내 인사들의 귀국 요청에 따라 1932년 3월 16일 국내에 들어왔다. 그의 귀국은 상해 4년, 영국 유학 6년을 포함해 해외 활동 14년 만이었다. 귀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부인 민씨와 헤어졌고,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칩거생활을 계속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미군정이 실시되자 활동을 재개하였다. 먼저 김성수(金性洙), 장덕수(張德秀) 등 해외 유학파 지식인들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한민당)의 창당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한민당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하면서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 · 장덕수 등이 주도하는 보수적인 민족주의 계열과 유학파, 개화파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김성수 · 송진우 등 11명을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위촉하면서 윤보선을 군정청 농상국(農商局) 고문과 군정청 경기도지사 고문으로 위촉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한민당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1947년 4월 경영난에 빠진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인수해 사장이 되었다. 발행부수 1만 2000부의 민중일보를 활용해 이승만을 적극 도왔으며, ‘이승만 환국 기념사업회’의 대표를 맡아 이승만의 전기(傳記) 집필 작업을 도왔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자 이승만 국회의장 비서실장에 기용되었고, 같은 해 12월 제2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은 숙부(叔父) 윤치영이었다. 서울시장 재임 중이던 1949년 1월 6일, 안국동 자택에서 여성 신학자 공덕귀(孔德貴)와 결혼식을 가졌다. 같은 해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어 1년여 간 재임하였으며, 1950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기독교 자선기관인상이군인신생회장, 1952년 한영(韓英)협회 회장 등을 맡았다.
윤보선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5월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야당으로 돌아서며 이승만 대통령과 헤어졌다. 1954년 5월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종로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만든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발췌개헌이 강행되자 반대투쟁을 벌였다. 1957년에는 야당인 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고,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9년에는 민주당 최고의원에 선출되면서 야당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 특히 신익희(申翼熙) · 조병옥(趙炳玉) 등 민주당 구파의 핵심 인사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그는 김도연(金度演)과 함께 구파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1960년 4 · 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 · 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일어나 사망자가 발생하자 윤보선은 민주당 최고위원으로서 3 · 15부정선거 진상조사단장을 맡아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다. 1960년 4 · 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자 새롭게 집권세력이 된 민주당은 내각제 하에서의 대통령과 총리 자리를 둘러싸고 이른바 신파(新派)와 구파(舊派)간에 심각한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구파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던 윤보선은 결국 신 · 구파의 협상에 의해 1960년 8월 12일 실시된 양원 합동회의에서 재적 259석 중 208표를 얻어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윤보선은 신파인 장면(張勉)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이었던 경무대(景武臺)를 청와대(靑瓦臺)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윤보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구파와 장면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신파는 조각(組閣)과 국정운영 과정에서 대립하면서 국정혼란을 자초하였다. 1961년 5 · 16이 발생하였다. 당시 윤보선은 군사정변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군부세력과 갈등을 빚으며 두 차례 하야를 번복한 끝에 1962년 3월 22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1963년 10월, 민정이양을 앞두고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5 · 16주체세력이 만든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에 맞서 민정당(民政黨)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대결하였지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윤보선은 부정선거와 관권선거가 자행되었다고 비판하면서 “내가 사실상의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말을 남겼다. 대선 패배 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서울 종로구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인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1964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 추진에 반대한 윤보선은 유진오 · 함석헌 · 장준하 등 각계 지도층 인사들을 망라해 ‘대일(對日)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위원장을 맡아 반정부 투쟁에 앞장섰다.
1965년에는 민주당과 범야권 세력을 통합해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였으며, 1966년에는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건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해 총재가 되었다. 곧이어 야당을 통합한 신민당(新民黨)의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다시 통합야당의 대통령후보가 된 윤보선은 1967년 2월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116만여 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후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추진하자 신민당과 재야세력이 참여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주도하며 연대투쟁을 이끌었고,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도 대정부 투쟁을 벌이는 등 타협보다 선명성을 강조하며 박정희 정부와 충돌하였다.
1971년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해 총재에 선출되었고, 1973년에는 ‘헌법개정 청원운동본부’를 구성하고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민주구국 헌장(民主救國憲章) 발표 사건을 비롯해 1974년 민청학련(民靑學聯)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구형받기도 하였다. 한편 1976년 김대중, 함석헌 등 재야 지도자들과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른바 명동사건(明洞事件), 1977년 3 · 1민주구국선언, 그리고 1979년 YWCA 위장결혼 사건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인 공덕귀도 민주화관련 구속자 석방운동, 여성노동자 생존권투쟁, 빈민선교활동 등을 통해 남편을 도왔다.
1979년 윤보선은 야당인 신민당(新民黨) 총재상임고문에 취임한 이후부터 서서히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1980년, ‘ 서울의 봄’ 때 윤보선은 김영삼 · 김대중 두 사람을 안국동 자택으로 불러 후보 단일화를 주선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부에서 윤보선은 5공화국의 국정자문위원회 위원과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 1986년 민족사(民族史) 바로잡기 국민회의 의장 등을 맡으며, 5공화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1987년 제13대 대선 때는 여당 후보인 노태우를 지지해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민주화운동을 해온 그가 신군부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정치철학보다 인간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명사정치(名士政治)’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윤보선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엘리트 정치와 유약한 리더십의 한계를 보였다는 비판적 평가도 있다. 1990년 7월 18일 안국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으며, 가족장을 치른 뒤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