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설 ()

연봉문집
연봉문집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비변사낭청, 청풍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조(公造)
연봉(蓮峯)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8년(명종 13)
사망 연도
1622년(광해군 14)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주요 관직
호조정랑|비변사낭청|청풍군수
정의
조선 중기에, 비변사낭청, 청풍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참봉 이계장(李繼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이언침(李彦忱)이다. 아버지는 이지남(李至男)이며, 어머니는 정원(鄭源)의 딸이다.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정세규(鄭世䂓)·목낙선(睦樂善)과 교유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6년(선조 19)에 효행과 순덕(純德: 도덕을 빠짐없이 행함. 또는 순수한 덕)으로 남부주부에 특별 임명되고, 다시 청산현감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뜻을 거역하지 못해, 그 해 겨울 무주현감을 거쳐 이듬 해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1591년 한성부판관이 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의 발발로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지자 구제에 힘썼다. 이듬해 공조정랑으로 정릉(靖陵)의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郎廳)을 겸했으며, 해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그 해 겨울 왕과 함께 환도하면서 군향(軍餉) 수급의 책임을 지고, 또 비변사낭청까지 겸해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2월에 덕천군수로 나갔으나 1594년 어머니 정씨(鄭氏)의 사망으로 사직하였다. 1596년 청풍군수에 제수되었는데, 군(郡)이 고향 가까이 있어서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해 얼마 되지 않아 충북에서 가장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1599년 이산해(李山海)의 강력한 추천으로 상원군수로 나갔다.

1601년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듬해 연안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군자감부정·사도시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천부사·예빈시부정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고, 1610년(광해군 2) 부호군 임명도 거절하였다.

그 뒤 승지 등의 직책을 내렸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해 끝내 벼슬을 사양하였다. 서울 삼청동 백련봉(白蓮峯) 아래에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학문에 전심해 경사·천문·지리·율학·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당시 사대부의 사표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633년 인조가 특명으로 정려를 내렸는데, 편액을 효자삼세(孝子三世)라 하였다. 저서로는 『연봉집』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백헌집(白軒集)』
『용주유고(龍洲遺稿)』
『연봉집(蓮峯集)』
『어우집(於于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차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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