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민촌(民村). 충청남도 아산 출신. 1904년 어머니가 죽고 가난한 가운데 서당을 다니다가, 1907년 사립영진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8년에는 논산 영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원생활도 하고, 약 3년간 호서은행 천안지점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세이소쿠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를 고학으로 다녔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 뒤 창작에 몰두, 1924년 『개벽』 창간4주년기념 현상작품모집에 단편소설 「오빠의 비밀편지」가 당선되었다. 1925년에 조명희(趙明熙)의 알선으로 조선지광사(朝鮮之光社)에 취직하는 한편 카프(KAPF)에 가맹하였다. 1931년에는 카프에 대한 제1차 검거로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초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월북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다. 월북 전의 작품 활동을 보면 단편소설 90여 편, 단행본 14권, 희곡 3편, 평론 40여 편으로 매우 활발한 문필 활동을 한 작가이다.
대표작으로는 1933년 5월 30일부터 7월 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서화(鼠火)」와 1933년 11월 15일부터 1934년 9월 2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고향」이다.
후자는 조선 농민 생활에 대한 대서사적 작품으로 농민소설의 정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기영의 작품들은 식민지하 조선의 농촌 현실을 무대로 한 것으로 농촌의 현실과 그 모순의 극복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농촌에서 나서 그곳에서 자라면서 모순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대응 방식 창출에 노력한 결과라 할 수 있다. 1984년 8월 9일 병으로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북한에서 발표한 장편소설로는 「땅」 제1부 ‘개간편’(1948)과 「땅」 제2부 ‘수확편’(1949), 「두만강」 제1부(1954) · 제2부(1957) · 제3부(1961)와 「조국」(1967), 「역사의 새벽길」 상(197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