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이(子彛), 호는 결재(潔齋). 이정룡(李廷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택(李澤)이다. 아버지는 이병겸(李秉謙)이며, 어머니는 윤상명(尹商明)의 딸이다.
1730년(영조 6) 경술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여러 차례 사간원정언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교리·사간원헌납을 역임하였으며, 1739년 밀양군(密陽君) 이완(李梡)이 진위사 겸 사은사(陳慰使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갈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이완을 수행하였다.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 승지·홍문관부제학·대사간·이조참의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이천기(李天紀) 등과 함께 혈당(血黨: 피로써 맹세하여 맺은 당)을 이루어 결속을 다졌으며, 재물을 물쓰듯한다는 혐의로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무사하였다. 1734년 회천(回薦) 때에 조명경(曺命敬)의 추천 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던 사건에 연루되어 검열직이 삭제되었다.
그 뒤 관직이 삭탈되어 있던 중 1735년 소를 올려, 영조가 사초(史草)를 열람하고 불사르게 한 것에 대하여 그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추록(追錄)할 것을 청하는 등의 강직함을 보였다.
또, 1739년 정언 홍계희(洪啓禧)의 소가 못마땅하다 하여 해남에 유배시키려 하자, 그 부당함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진도에 유배될 뻔하였다. 승지 구택규(具宅奎)의 도움으로 중추(重推)로 감형되었다가 1740년 응교로 복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