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년(선조12)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89년(선조 22) 이산해(李山海)의 천거로 오위(五衛) 사용(司勇)에 등용되었으며, 그 뒤 사과에 오르고 1592년에는 상호군에 승진되었다. 임진왜란 중 황해도좌방어사로 있다가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임, 경주탈환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경주탈환전 때에 정기룡(鄭起龍)·권응수(權應洙) 등의 의병장과 합세하고 명나라의 원군과 연합하여 수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차되었다. 1594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나아갔으며, 1601년에는 충청도 일원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였고, 1605년 함경도순변사로 변방을 맡았다.
광해군 때에는 평안병사·훈련대장이 되었고, 특히 광해군 때 북방의 대후금 변정(對後金邊政)에 크게 기여하였다. 인조 초에는 순변부원수(巡邊副元帥)가 되었으나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내응(內應)을 염려하여 기자헌(奇自獻)을 비롯한 35명이 처형될 때 함께 사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