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은 해방 이후 초대 육군참모총장, 육군대학 총장, 육군참모차장 등을 역임한 군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0년에 태어나 1985년에 사망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편입했다가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을 졸업하였다. 1918년 일본군으로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하여 공산주의자의 동태를 파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전선에 출정하여 대동아건설정신을 선전하고 조선인의 입대를 적극 권유하였다. 해방 이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도록 후원하였으며 공비토벌 작전 등을 수행하였다.
빈농으로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1906년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 근처 여관에 묵었는데, 여관 주인의 소개로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의 부관이던 이갑 참령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이갑의 배려로 그해 가을 보성보통중학 1기로 입학해 수학하다가 1908년 노백린(盧伯麟)이 교장으로 있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편입했다.
1909년 9월 통감부에 의해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2년으로 편입해 1912년 본과를 졸업했다. 도쿄에 있는 제1사단 제3연대에서 6개월간 실습한 후 1912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제26기생으로 졸업해 견습사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16년 지바〔千葉〕보병학교에서 3개월간 보병전문교육을 받은 후 육군 중위로 진급했다. 1918년 8월 일본군으로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일본 파견군사령부로 배속되었는데, 그곳에서 러시아인 · 중국인 ·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동태를 파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 무렵 이갑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무남독녀인 이정희(李正熙)와 결혼했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육사 26기 동기생인 김광서(金光瑞), 지석규(池錫奎, 지청천으로 개명)와 함께 일본군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탈출할 것을 모의해 김광서와 지석규는 탈출했으나 이응준은 실행하지 않았다.
1920년 평양에서 독립군자금을 모집하는 최성수에게 권총을 제공했다는 의혹으로 평양헌병대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단순 도난 사건으로 처리되었다. 같은 해 9월 일제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 육군대장의 배려로 용산에 주둔한 일제조선군 제20사단 제40여단 제79연대로 배속되었다. 1925년 대위로 진급해서 대대부관을 거쳐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11월 일본군이 중국 동북지역 군벌인 장쭤린〔張作霖〕의 부하인 ‘궈쑹링〔郭松齡〕 모반사건’에 개입하기 위해 중국 봉천(奉天)으로 출동할 때 일제조선군으로 파견되어 현지 경비업무를 수행했다. 1933년 일본군 육군 소좌로 일제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부관, 1934년 8월에는 제79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35년 7월 일본군 장교로 장기 복무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6년 일본군 육군 중좌로 진급해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약학전문학교의 교련담당 배속장교로 일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전선에 출정하여 제20사단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938년 1월 중국 베이징 주둔 일본군 북지파견군(北支派遣軍)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난위안〔南苑〕 전투, 스자좡〔石家莊〕 전투, 산시성〔山西省〕 전투에 참전하고, 선무공작을 맡아 ‘대동아건설정신’을 중국인에게 선전하는 일을 했다.
1939년 1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고, 8월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병사구(兵事區) 사령부를 거쳐 1940년 8월부터 일제조선군 대구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941년 육군 대좌로 승진했다. 1942년 5월 일본군 북지독립 제7여단으로 배속되었다가 1943년 초 중국 칭다오〔靑島〕 교육대 대장으로 5개월간 현지 신병보충과 교육에 종사했다.
일본군 장교로 재임하면서 중일전쟁을 선전하고 조선인의 입대를 권유하며 적극적인 참여를 선동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생사를 초월하라」(『매일신보』1943.8.3.)라고 회견하거나 1943년 11월 9일 경성부민회관에서 열린 ‘특별지원병제는 반도 민중의 활로, 학도의 중대책임을 각오하라’라는 강연을 들 수 있다. 같은 해 가을 독립 제7여단에서 편성한 토벌부대의 지휘관을 맡아 산둥성〔山東省〕 황해안지구의 팔로군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1943년 말부터 1944년 초까지 중국 진저우〔錦州〕 정차장사령관(停車場司令官, 수송사령관)으로 근무했다. 1944년 봄 서울 용산정차장 사령부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조선과 만주 사이의 수송업무를 지휘했는데, 주로 북중국 전선과 관동군에게 보내는 병사 · 장비 · 피복 · 군량 등을 수송했다. 1945년 6월 원산항 수송부로 배속되어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으며, 소련군이 진주하기 직전 서울로 탈출했다.
해방 후 11월 전조선임시군사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원용덕(元容德)과 함께 같은 해 12월 군사영어학교 생도모집을 주도했다. 이듬해인 1946년 1월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고문으로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는 등 핵심적으로 건군을 주도했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도록 후원했다. 6월 대령으로 국방경비대 감찰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제1여단과 제3여단을 편성하였고, 1947년 제1여단장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여 소장으로 승진했다. 1949년 5월 춘천 제8연대의 2개 대대병력이 월북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직을 사퇴하고 제3사단장과 제5사단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발발한 이후에 제5사단장으로 수원지구방위사령관, 전라남도편성 관구사령관, 서남지구전투사령관, 마산지구와 제주지구계엄사령, 전라남도 병사구 사령관 및 전라남도 계엄 민사부장 등으로 복무하며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와의 불화로 1950년 11월 전역하고, 제2대 상이군인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사임하자 1952년 11월 현역으로 복귀해서 육군대학 총장에 취임하고 중장으로 승진했다. 1953년 제1훈련소 소장, 1954년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다.
1955년 9월 중장으로 예편한 후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해서 1958년 9월 사임했다. 사임한 직후 1958년 가을부터 자유당 성북을구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다. 1960년 7월 29일 총선거에서 무소속(강원도 철원)으로 민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 이후 정치활동이 규제되었고, 1962년 재향군인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63년 정치활동 규제대상에서 풀려 그해 8월 1일 ‘국민의당’ 창당 발기인대회 지도위원으로 추대되었다. 1965년 성우구락부(星友俱樂部) 회장, 1967년 반공연맹 이사장, 1968년 상무재단(尙武財團) 이사장, 1979년 국정자문위원, 1980년 국방정책자문위원장, 통일원 고문 등을 지냈다. 1982년 자서전 『회고 90년』을 간행하였고, 1983년 3월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이응준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 · 11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84∼80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고, 육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