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자천(自天)이며, 본관은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다. 이규보(李奎報)의 손자이며, 사재소감(司宰少監)을 지낸 이함(李涵)의 아들이다.
고종 때 등제하여 하동감무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곧 한림원에 뽑혀 들어갔다. 그 뒤 승진을 거듭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이 되었으며,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환도할 때 예부의 문적(文籍)을 잘 수습한 공으로 우사간에 제수되었다.
1286년(충렬 12) 10월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1288년 7월 봉조대부(奉朝大夫) 부지밀직사사 판도판서 문한학사(副知密直司事版圖判書文翰學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1292년(충렬 18) 5월 세상을 떠났다.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통민(通敏)하고 기억력이 좋다는 평을 들었다. 불대사(佛臺寺) 자진원오국사정조탑비(慈眞圓悟國師靜照塔碑)를 지었다. 그러나 주색을 좋아하고 절조가 없어 일찍이 김홍유(金洪裕)라는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고 글을 대신 써주어 급제시킨 일로 사림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