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 이계(李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정귀(李廷龜)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명한(李明漢)이며, 어머니는 나주 박씨(羅州朴氏)로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
1628년(인조 6) 17세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나이가 어려 벼슬대신 공부에 열중하였다. 1633년 검열이 되고, 대교·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또한 척화신으로서 화의를 반대해 이듬 해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다시 위원으로 이배되었다.
뒤에 남노성(南老星) 등의 주장으로 풀려나 인조 말년에는 사간에 올랐으며, 1647년 창덕궁수리소도청으로 공을 세워 당상관에 올랐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우승지에 발탁되어 총애를 입었으며, 대사간을 거쳐 1652년(효종 3)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탄핵받은 특진관(特進官) 윤강(尹絳)을 구하다가 한 때 파직되었다가 홍무적(洪茂績)의 탄원으로 복귀하였다.
이어 부제학·대사간·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범금자(犯禁者)를 청탁으로 석방했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54년 정조 겸 진하부사(正朝兼進賀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청나라의 실정을 보고해 효종의 북벌계획 수립에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도움을 주었다.
곧 이어 이조참판·대사헌·대사성 등의 청요직을 거쳐 1656년 부제학으로 실록수정청당상에 임명되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 때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1659년 대제학 올라 문형(文衡)을 장악하였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에 차출되고, 찬집청당상(纂輯廳堂上)으로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예조참판으로서 대제학을 겸했으며, 1660년(현종 1) 실록청당상으로 『효종실록』 편찬을 책임 맡았으나, 이른바 미선사건(米船事件)으로 남인 계열의 이지익(李之翼)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 등을 지내고, 실록편찬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으며, 공조판서·예조판서·좌우참판·호조판서를 거쳐 1666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죽었다.
이듬 해 생전에 약방제조로서의 공이 인정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인 계열이 편찬한 『현종실록』에서는 학술이나 재능도 없는 주정꾼으로 평가되었으나, 서인 계열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할아버지·아버지와 함께 3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낸 것은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이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