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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윤(李廷允)

근대사인물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노동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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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이정윤 전후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노동운동가.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별명은 정두(廷斗)·현수(賢樹)·윤수(允樹). 전라북도 순창 출생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오성(五星)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경도(京都) 동지사(同志社)대학 예비과, 동경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를 다녔다.
1921년 11월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학우회 총회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는 문서를 배포하다 검거되어, 다음 해 1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 9개월을 선고받고 11월 만기 출옥하였다.
김약수·김종범 등이 조직한 초기 사회주의사상단체인 북성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2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3년 8월 북풍파 공산주의그룹과 서울파 공산주의그룹 간의 갈등 때문에 일어난 ‘장안여관사건’ 당시 서울파에 가담하였다.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 청년부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12월에는 사회주의자동맹 결성에 참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8월에는 경기도청년연합회 발기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9월 고려공산동맹의 민족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10월에는 사상단체 전진회(前進會)의 결성에 참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월 고려공산동맹의 대표자로서 화요파 조선공산당 대표자와 함께 양 단체의 통합 문제를 협의하였으며, 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표방하는 당내 비밀단체인 ‘레닌주의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4월에 ‘조선사상동맹’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6월에는 일본에서 발간된 『대중신문』 창간호에 원고를 기고하였다.
그해 말 모스크바로 파견되어 모스크바공산대학을 졸업하고, 1928년 1월 코민테른의 조선문제결정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조선공산당 3차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어 당 대회를 준비했으며, 2월 대회에서 중앙간부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달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30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31년 1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전남 곡성에서 옥과(玉果)노동회를 적색농민조합으로 개조하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1934년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1년 말부터 정희영(鄭禧泳)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11월에는 서중석(徐重錫)과 함께 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해방 직전 적기파(赤旗派)라고 불리는 조직을 배경으로 영등포, 전라남북도 등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45년 3월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었다가 8·15를 맞아 석방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장안파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장안파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재건파)의 통일을 논의하는 모임에 참가, 통합 조선공산당중앙위원을 구성하기 위한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9월 조선공산당 열성자대회에 참석하였다. 같은 달 조선인민공화국 보건부장 대리로 선정되었으며, 조선공산당중앙위원을 지냈다. 11월에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 간담회’에 서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박헌영(朴憲永) 중앙을 비판, 「조선공산당대회 소집준비위원회 구성 건의서」를 13인 당원의 연명으로 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4월 제2회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8월 합당 문제와 관련해 박헌영(朴憲永) 중앙에 반대하는 성명서 「합당 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 제군에 고함」을 연명으로 발표하였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당하였다.
11월에 사회노동당 결성에 참여하여 임시중앙위원으로 선정되었는데, 그후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에 출두하여 3당합당 문제에 관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1948년 후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이듬해 다시 서울에 왔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6·5전쟁 중에 월북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공산주의운동사』2·3·5(김준엽·김창순,청계연구소,1986)

  • 『남로당연구』(김남식,돌베개,1984)

  • 『조선공산당파쟁사』(장복성,대륙출판사,1949)

  • 『지도자군상』(김오성,대성출판사,1946)

  • 「1920연대 ‘통일’조선공산당의 결성과정」(박종린,『한국사연구』102,1998)

  • 『現代史資料』29(梶村秀樹·姜德相 編,みすず書房,東京,1972)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1년)
강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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