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경기도 안성에서 부호 박승육(朴承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11월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접대부장이 되었고, 1920년 6월에는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서무부장이 되는 등 재학 중 재일조선인 청년 ·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자인 다카츠 마사미치〔高津正道〕와 밀접한 관계로, 그가 주도한 사상운동 단체 효민회(曉民會)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변희용(卞熙鎔)이 주재한 사회주의 잡지 『전진(前進)』을 이정윤(李廷允)과 함께 발행하였다. 또한 변희용, 이정윤과 함께 사상운동 단체 시월회(十月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적우회(赤友會)와 통합을 통해 1923년 1월 사상운동 단체인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3월 귀국한 후 6월에 『 조선일보』에 "조선물산장려를 대변하려는 나공민군에게 고함"이라는 물산장려운동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여 사회부 담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해 12월 사회주의자동맹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에는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연구부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0월에는 전진회(前進會) 조직하였다.
1927년 7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그해 9월과 10월 사회과학연구사를 통해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과 『임금 · 가격 · 이윤』의 번역서와 저서 『사회진화론』을 출간하였다. ML파의 주도에 반대하여 그해 12월 춘경원에서 서상파가 개최한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선전부 담당 중앙집행위원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참여하여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경기도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였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1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 3당이 합당해 만든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 플렉션에 배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