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정암(正菴). 경기도 광주 출신. 25세 때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 1898년 6월 천도교 2대 교조 최시형(崔時亨)이 서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자, 옥리를 매수하여 시체를 빼내어 광주에서 장례를 치렀다.
1902년에는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구국의 방도를 논의하였다. 당시 이종훈은 천도교 장로였는데, 1919년 2월 25일 천도교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을 배관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갔다가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을 만났다.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날인하기로 약속하였다. 2월 28일 밤에는 서울 재동의 손병희 집에서 3·1독립운동에 대한 최종회의에 참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였다.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1922년 7월 천도교인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