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 아버지는 대사간 효원(效元)이다.
광해군 때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아버지가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형인 한림 정(瀞)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자, 그는 벼슬을 단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릉군(咸陵君)에 봉하여졌다. 반정하던 날 심기원(沈器遠)이 궁중에 쌓여 있는 물건을 나누어 가지자고 하였으나 분연히 거절하였다. 공신에게 지급되는 전답을 모두 반환하여 청백한 사람으로 칭송이 높았다.
이듬해인 1624년 개성부유수가 되고, 그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49년(인조 27) 인조가 죽자 장릉(長陵 : 인조릉)의 수릉관(守陵官)이 되고, 이어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1652년(효종 3)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그 해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653년에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669년(현종 10)에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처음에 충정(忠靖)으로 시호를 받았다가 숙종 때 충민(忠敏)으로 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