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가평(加平). 자는 창백(昌伯). 판도판서(版圖判書) 춘계(椿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평의사사 이침(李忱)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다림(李多林)이며, 어머니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이송리(李宋理)의 딸이다.
1455년(세조 1) 12월 판관으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전라도절도사로 전주부윤을 겸하였다. 처음에는 연산군(連山君)에 봉하여졌다가 곧이어 가평군(嘉平君)으로 개봉되었다.
1471년(성종 3) 윤2월 행공주목사를 거쳐, 1477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전임되었다가 12월에 청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청주목사로 도임할 때 너무 많은 물건과 수행원들을 거느렸다는 비판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479년 정월 다시 서용되고, 1483년 10월 다시 가평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옥구·무장·석성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옥구현감 당시 체임된 적이 있으나 현명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기 보다는 지역 민심이 나빠서 잘 다스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체임된 이후 ‘30년 동안 옥구현에서 수령의 역할을 제대로 한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승정원의 보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490년 윤9월 부총관에 임명되고, 1492년(성종 23) 서얼(庶孼)의 인재를 거두어 쓰고자 우림위(羽林衛)를 설치할 때 그 장(將)을 겸임했다. 전라도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는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시호는 평호(平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