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차산(次山), 호는 현포(玄圃). 이원근(李元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통(李通)이고, 아버지는 이경증(李景曾)이며, 어머니는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의 딸이다. 할이버지 이통이 이인상(李麟祥)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인상의 증손이기도 하다.
1654년(효종 5)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효종이 죽자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치열할 때, 성균관의 학생으로서 3년상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를 통렬히 비판하는 소를 올림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봉교(奉敎)로 임명되었다. 1662년 정언이 되고, 1665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권점(圈點) 6점을 받았으나 홍문관관원으로 기용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 1668년 이조좌랑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에 해운판관(海運判官) 조가석(趙嘉錫)의 탐학과 비리가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을 때,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이를 비호한 것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1670년 다시 등용되어 부교리·부응교·사간 등을 거쳐, 다음 해 삼남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암행을 마치고 돌아와 전라도지방의 기근이 극심함을 아뢰고 남원·무안·진안현감을 파직하도록 계(啓)를 올렸다.
그 뒤 동부승지·우승지·예조참의 등을 거쳐 1673년 대사간이 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성격이 온화하여 일찍부터 덕망을 얻어 중요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예에도 조예가 있어 문장으로써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