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량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선전관, 절충장군, 덕만보권관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형재(馨哉)
대명거사(大明居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84년(선조 17)
사망 연도
1645년(인조 23)
본관
영천(寧川)
주요 관직
선전관|절충장군|덕만보권관(德萬堡權官)
관련 사건
정묘호란
정의
조선시대 선전관, 절충장군, 덕만보권관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영천(寧川). 자는 형재(馨哉), 호는 대명거사(大明居士). 아버지는 한성판관(漢城判官) 이명세(李名世)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며, 영교위(營校尉)를 거쳐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호가(扈駕)에 뽑혀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 때 강화가 성립되자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1631년 청나라가 가도(椵島)를 침범하고 군선 및 식량을 비롯하여 군수품을 요구하자 자신이 선봉장이 되어 청을 칠 계획을 구상한 소를 올리는 한편, 청의 재침략을 염려하여 방어태세 완비와 관서지방 변경지역의 주민 확보 및 안정을 위한 시책을 건의하는 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특히, 안주와 의주를 연결하는 최북단 국경방위선을 형성하기를 주장하였다. 1632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직되었으며, 곧 덕만보권관(德萬堡權官)에 제수되었다.

1633년 관서지방의 직관(直官)으로 부임하여 그곳의 피폐한 실정과 기근·한해로 죽어가는 국민들의 고통을 절감하는 근본적인 구휼정책에 대하여 첩(牒)을 올리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에 은거하여 지냈다. 저서로는 『대명거사유고(大明居士遺稿)』 1책이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대명거사유고(大明居士遺稿)』
집필자
한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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