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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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정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정면
건축
유적
국가유산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해방 이후 1965년에 보수해 1단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석조 불탑. 석탑.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보(1997년 01월 01일 지정)
소재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1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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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해방 이후 1965년에 보수해 1단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석조 불탑. 석탑.
내용

199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8.5m. 석탑은 마한(馬韓)의 도읍지로 알려진 곳에서 남쪽으로 2㎞ 정도 뻗은 산줄기 끝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금마지(金馬誌)』에는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으로 돌을 쌓은 것이다. 속전에는 마한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고 전한다. 이전에는 흙으로 만든 받침을 둔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졌지만, 1965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원래 돌로 만든 받침을 갖추었음이 밝혀져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받침돌은 돌을 쌓은 구조가 아니라, 목탑처럼 네 귀퉁이의 주춧돌 위에 각 변의 길이가 같지 않은 부등변(不等邊)의 8각 돌기둥을 높이 세우고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기 위해서 길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창방(昌枋)이나 평방(平枋)처럼 올려 놓은 모습이다. 평방 위에는 1층 몸돌을 놓았고, 아울러 받침돌의 덮개돌을 받치도록 구성하였다. 네 기둥의 중심인 가운데 부분에는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心礎石)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목탑의 기둥인 심주(心柱)처럼 여러 단의 네모난 돌을 쌓아 올렸다. 8각 기둥과 네모난 돌 사이에는 막돌과 흙을 다져 메웠는데, 흙 속에서 백제시대에 만든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고, 부서진 덮개돌과 면석의 일부도 발견되었다. 파손된 면석의 각 면에는 2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보수 공사를 진행하던 중, 1층 지붕돌 가운데 부분과 심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확인되었다.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1층 지붕돌의 돌은 백제시대에 주춧돌로 사용하였던 돌을 다시 이용한 듯 보이는데, 좌우에 ‘요(凹)’자형의 네모난 홈을 만들고서 뚜껑이 있는 금동 상자[有蓋金銅函]를 각각 안치한 상태였다. 오른쪽 금동함 안에는 금으로 만든 유개방합(有蓋方盒)이 있었고, 그 속에는 금제연화대좌(金製蓮華臺座)와 함께 연꽃 모양의 뚜껑을 갖춘 녹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인 장경원저병(長徑圓底甁)도 확인되었다. 왼쪽 금동함 안에는 금제유개장방합(金製有蓋長方盒)이 있었고, 다시 그 안에서는 2줄의 금띠로 묶인 금으로 만든『금강경(金剛經)』이 발견되었는데, 펴고 접을 수 있는 절첩식(折帖式) 금구(金具)로 연결된 상태였다.

심초석에 설치된 사리(舍利) 구멍은 ‘품(品)’자형으로 조성되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배처럼 생긴 광배(光背)를 갖춘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과 청동방울[靑銅鈴]이 들어 있었고, 북쪽 구멍에서는 향(香) 등이 발견되었지만, 서쪽 구멍의 것은 일찍이 도굴당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塔身部)는 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1층 몸돌은 모서리 기둥을 조각한 기둥 모양의 돌을 네 귀퉁이에 세우고서, 그 사이에 가운데 기둥을 새긴 면석을 끼워 세운 모습이다. 2층 몸돌은 각 면마다 1장의 돌을 세워 조립하였고, 3층 이상의 몸돌은 2장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1∼3층의 지붕돌은 윗면과 밑면에 각각 4장씩 모두 8장의 돌로 조립되었고, 4∼5층의 지붕돌은 윗면과 밑면에 각각 2장씩 모두 4장의 돌로 구성되었다. 추녀는 얇고 밑면은 대체로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밑면 받침은 모두 3단이다. 네 귀퉁이는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이는데, 전각(轉角) 아래 부분에는 풍령(風鈴)을 달려고 만든 구멍이 뚫려 있다. 지붕돌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도 적은 편이며, 꼭대기에는 윗 몸돌을 받치기 위한 돌이 끼워져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부서진 보륜(寶輪) 1개 등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많은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1965년에 보수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지붕돌의 모습이 백제계 석탑을 따르고 있고, 탑신부의 결구(結構) 수법이나 받침 표현 방식이 신라 석탑을 따르고 있다고 하여,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보수 공사를 진행하면서 받침돌의 구성 방식이나 사리장엄구의 양식 등이 확인한 뒤에는 후대까지 유행하였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 석탑의 양식을 더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심초석과 심주의 구조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962년 지정)의 받침돌 구조와 일치하는 점을 들어, 백제시대에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飜案)하는 과정에서 건립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익산 왕궁리 유적-발굴 20년 성과와 의의-』(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편, 주류성, 2009)
『한국의 탐구』-한국의 석조미술-(정영호, 서울대출판부, 1998)
『신라석탑연구』(장충식, 일지사, 1987)
『문화재대관』-보물 2-(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국보』6-탑파-(진홍섭 편, 예경산업사, 1983)
『한국미술전집』6-석탑-(황수영 편, 동화출판공사, 1974)
『조선 탑파의 연구』(고유섭, 을유문화사, 1954)
「백제양식석탑의 형성과 전개의 시발점」(전지혜,『문화재』42-4, 2009)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과 사리장엄구 연구」(한정호,『신라사학보』16, 2009)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황수영,『고고미술』66,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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