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군보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풍천(豊川, 지금의 황해도 송화)
정의
고려 후기에,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주(豊州). 증조는 어사(御史) 임주(任澍), 조부는 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아버지는 성균좨주(成均祭酒) 임경유(任景儒)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52년(공민왕 1)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가 되고, 1355년 천추사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밀직부사가 되었다.

이어 환관 김빠앤티므르[金伯顔帖木兒]의 거짓 왕지(王旨)로 내승제조(內乘提調)가 되었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태안군에 유배되고, 다시 제주에 이배되었다. 다시 기용되었으나 1356년 기철(奇轍) 등이 죽임을 당할 때 삭발하고 삼각산(三角山)에 숨었다가 붙잡혀 장형(杖刑)을 당하였다.

1365년 새로 집권한 신돈(辛旽)에 의하여 밀직부사에 복직되어 김란(金蘭)·목인길(睦仁吉)과 함께 궁중에서 서무(庶務)를 맡아 총애를 받았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신돈의 천거로 재상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최영(崔瑩)·이구수(李龜壽) 등이 쫓겨나는 것을 반대하고 천승(賤僧)인 신돈에게 정사(政事)를 맡기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같이 복직된 김보(金普)가 신돈의 참소로 재상직에서 파면된 이후로 국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어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을 논하다가 쫓기게 될 때 이를 구호하여 더욱 신돈의 미움을 받았다. 이 때 신돈이 참소하여 전주에 유배된 목인길을 변호하다가 여흥(驪興)으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집필자
박성봉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