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자 칼뱅(Calvin, J.)의 신학과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개혁교회의 한 지파이다. 웨스트민스터의회의 ≪교리문답≫과 ≪신경 信經≫에 신앙의 표준을 두고 있지만, 최고의 표준은 칼뱅신학의 특징인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있다. 즉, 성서의 말씀을 교회와 전통의 권위 위에 두고, 성서를 정확하고, 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교리는 근원적으로 칼뱅주의적이고, 예정론과 신의 영광에 핵심을 두고 있다. 성찬예식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임재(臨在)는 영적인 임재이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동시에 은혜를 받는 예전으로 생각하여 성찬예식은 빈번히 지켜지도록 되어 있고, 설교와 성찬을 교회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다.
장로교선교사들의 한국인들과의 접촉은 한미수교 이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1866년(고종 3) 9월에 발생하였던 셔먼호(Sherman號) 사건 때 이 배에 동승한 영국의 런던선교회 소속 장로교선교사인 토머스(Thomas,R.J.)가 대동강까지 올라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한문으로 된 성서를 나누어주었다. 그는 그 배의 선원들과 함께 순교하였으나, 그가 전해준 성서가 평양지방 사람들 사이에서 읽혀지고 있었다.
또, 만주 동북지방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선교사 로스(Ross,J.), 목사 매킨타이어(MacIntyre,J.)의 전도를 받은 서상륜(徐相崙)과 이응찬(李應贊) 등 여러 명이 로스의 한국어 성서번역과 출판에 협력하는 동시에 기독교에 입교하고, 1883년에 서상륜은 복음서들을 몰래 국내로 가지고 들어와 그의 고향 황해도 솔내[松川]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배포, 전도하였다. 1884년 11월 그 곳에 우리 나라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마련하였다.
한편, 1884년 9월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알렌이 왕실의 신임을 얻어 1885년 4월에 광혜원을 개원하고, 이와 더불어 같은 시기인 1885년 4월 미국북장로교의 언더우드가 아펜젤러 부처와 함께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장로교의 한국선교는 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의 불안한 정국과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선교운동으로 인해, 1887년 7월 11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언더우드는 자기 집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개종자 1명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출발이 되었다.
그는 또한 빈곤한 아이들을 모아 먹이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뒤에 연희학교(延禧學校)로 발전해 나갔다. 그 뒤 헤론(Heron,J.W.)을 비롯한 장로교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했다.
캐나다장로교 출신 게일(Gale,J.S.)이 1888년 겨울 입국하여, 미국북장로교선교회에 소속되어 부산지방을 답사하였고, 목사 모펫(Moffett,S.A.)은 1890년 1월에 입국하여 평양 · 의주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미국북장로교선교회에 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장로교외국선교위원회에서 파견한 데이비스(Davis,J.H.)와 그의 누이동생 메리가 1889년에 입국했으나, 데이비스는 입국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의 모국 교회의 여신도연맹에서는 맥카이(Mackay) 부부와 멘지스(Menzies,B.) · 페리(Perry,J.) · 포셋(Fawcett,M.)을 파송하여 부산 초량에 자리를 잡고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891년 언더우드가 미국에 일시 귀국하여 한국선교상황을 보고하였을 때, 여기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남장로교선교회의 한국선교를 지원하고 나서, 1892년 2월에 테이트(Tate,L.B.) · 레이놀즈(Reynolds,W.) 등 7명의 선교사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으며, 캐나다선교사들이 입국한 것은 1898년 9월이었다.
즉, 캐나다해안지방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그리슨(Grieson,R.) 의사부부와 목사 푸트(Foote,W.R.) · 맥래(McRae,D.) 부부였는데, 이들보다 앞서 1893년에 개인적으로 입국하였던 캐나다장로교목사 매켄지(McKenzie,W.J.)가 황해도 솔내에서 모범적인 선교로 우리 나라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일사병과 고열로 정신이상을 일으켜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캐나다해안지방노회에서 한국선교를 서둘러 그들을 파송한 것이었다.
위의 4개 장로교선교회는 1893년 1월 28일에 장로교선교회협의회를 조직하여 한국에서 단일장로교회를 세울 것을 결정하고, 선교활동의 모든 문제를 협의하기로 하였다. 4개 선교회가 연합적으로 선교함으로써 인적 · 물적 자원을 절약하고,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여 효과적인 선교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구역을 분담하여, 미국북장로교선교회는 낙동강 이북의 경상남북도지방과 평안도 · 황해도의 서북지방을, 오스트레일리아선교회는 경상남도지방을, 캐나다선교회는 함경도와 만주 동북지방을 각각 담당하였는데, 이러한 선교지역분담은 감리교와도 협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계예양(敎界禮讓)의 정신은 장로교가 일찍이 1891년부터 적용하기 시작한 이른바 네비우스방법이라는 선교정책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중국 산둥성(山東省)에서 선교하던 목사 네비우스(Nevius,J.L.)가 그곳에서 실시하던 정책을 말한다.
즉, 첫째는 각자 자신이 발견한 생업에 충실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개인적인 일꾼이 되어 이웃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되, 자기의 생계는 자기의 직업을 통하여 해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비(自費)에 의한 개인전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전원칙(自傳原則)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자치원칙인데, 본토인 교회로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범위로만 교회기구와 방법을 발전시켜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 원칙은 본토인 교인의 교회로 육성시키는 방법인 동시에 점진적인 교회기구의 발전을 뜻하는 것이다.
셋째는 본토인 교회가 인재와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보다 나은 자질을 가진 사람을 뽑아 기용하는 것인데, 이를 자급원칙이라고 부른다.
넷째는 본토인 교인들이 자신들의 교회건물을 마련하도록 하며, 그 건물은 본토인의 건축양식을 따라야 하는데, 개체교회에 국한된 문제이다. 이 원칙은 자급원칙과도 통하나, 교회건물은 본토인 건축양식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표현원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자립선교 · 자립정책 · 자립수급의 3원칙에 따라 우리 나라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의 노력과 재력과 지혜로 세워지고, 유지되고, 발전해 나가는 토착교회선교정책에 의해 급속한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장로교의 정치, 즉 체제는 장로제도이다. 개체교회의 운영과 관리는 장로들과 목사로 구성되는 당회(堂會)가 장악하는데, 장로나 목사 어느 한 편이 없어도 당회는 구성되지 않거나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당회 아래 남녀집사들로 구성되는 제직회(諸職會)가 있어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돕는다. 집사직의 경력이 10년 이상이 되어 50세가 된 사람은 권사(勸士)로 피택된다.
집사는 당연직이고, 권사는 평생직이며, 장로는 정년 때까지 유임된다. 목사도 신급(信級)은 장로이지만, 목사교육을 이수하고 교회에서 청빙을 받으면 노회(老會)에서 절차에 따라 안수를 받고 임직(任職)하게 한다.
장로는 개체교회의 세례교인들로 구성되는 공동의회에서 투표로써 규정에 따라 선택되어, 노회의 시험을 거쳐 안수를 받아 임직하게 된다.
목사의 청빙은 공동의회의 결의에 따라 시행되며, 노회는 행정단위지역별로 구성되는데, 목사들과 장로들로 조직되어 소속교회들의 목회와 사무를 감독하는 치리기관(治理機關)이다.
노회는 그 교구 안에서 지리적 형편에 따라 몇 개의 시찰회를 조직하여, 시찰회 교구내의 교회들 사이의 목회와 사무의 협력과 감독을 행한다. 한국장로교는 1907년에 이르러 비로소 노회 하나를 조직하였는데, 이를 독로회(獨老會)라 불렀다.
한국장로교회가 독로회형식으로 조직된 것은 평양신학교의 졸업생 7명이 안수를 받은 1907년 9월 17일을 기해서였는데, 이 때 네 장로교선교부가 한국에서의 단일장로교회설립에 합의하여 그 통일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초대 독로회장에는 모페트가 선출되었다.
독로회 창립 당시의 교세는 선교사 32명, 한국인 목사 7명, 세례교인 1만 7890명이었고, 교회수는 1,022개 소, 각급학교 402개 소에 달하였다. 그 뒤 각 도내에 노회가 계속 조직되어 1912년 9월 1일에는 평양 여자성경학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소집되어 처음으로 장로교회는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총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교사, 한국인 목사와 장로 등 모두 221명이 총대로 참석하여 총회장에 언더우드, 회계에 블레어(Blair,W.N.)를 선출하고, 그 밖의 임원에는 한국인 회원이 선출되었다.
총회는 각 노회에서 총대로 피선된 목사와 장로로써 구성하되, 목사와 장로의 회원수는 동수인데, 총회는 장로교회의 최고치리기관으로 매년 소집된다. 이 창립총회를 기념해 한국장로교회는 중국 산둥성 라이양(萊陽)에 한국인선교사를 파견함으로써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였다.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의료선교와 학교교육에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1885년에 이미 서울에 고종의 윤허로 광혜원을 설립한 바 있는데, 이것이 뒤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되었고, 그 밖에도 평양에 기홀병원(紀笏病院), 부산 · 대구 · 여수의 나병원, 세브란스의 결핵병원 등을 설립하여 병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과 함께 구제사업을 펴나갔으며, 교육사업으로는 경신학교(儆新學校) · 정신학교(貞信學校) · 숭실학교(崇實學校)와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정진하였다.
이 결과 1909년 당시 장로교계 학교수는 이미 600개가 넘어섰고, 학생수도 1만 5000명에 달하고 있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이와 같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통해 신앙의 보존과 민족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일제는 기독교회가 그들에게 암적 존재임을 깨닫고 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켜 이른바 ‘105인 사건’을 날조했는데, 105인의 실형자 가운데 97명이 장로교인이었다. 이는 장로교회의 민족주의적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3·1운동으로 이어져, 수많은 교회지도자와 교인들이 참가하여 일제통치에 항거함으로써 교회의 전통과 민족정신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다.
그 뒤 교회성장과 함께 점차 토착적 민족교회 지향의 종파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여, 대구 이만집(李萬集)의 조선기독교회, 봉산(鳳山) 김장호(金庄鎬)의 기독교회, 차학연(車學淵)의 자유교회, 함태영(咸台永) · 전필순(全弼淳)의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 등 종파운동도 일어났다.
1920년대부터 사회풍조의 변천과 농촌의 피폐라는 현실에 직면한 교회는 사회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민족정신말살정책에 대항하였다.
즉, 전국적인 규모의 농촌강습소를 통하여 농민들의 경각심을 일으켜 농촌부흥을 도모하였고, 협동조합운동으로 소작인의 권익옹호에 앞장섰으며, 유곽폐지와 단연금주운동(斷煙禁酒運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은 더욱 극심해져, 이러한 사회운동마저 마비되고, 만주로의 강제이민으로 인한 농민의 격감은 점차 교회의 누출현상을 가져와 문을 닫는 교회가 속출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신사참배를 강요당해 교회의 신성은 더럽혀지고, 교회당은 가마니공장이나 헌병대로 징발되었으며, 선교사들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주기철(朱基徹)을 비롯한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 또는 투옥당하는 박해를 겪었다.
8·15광복이 되자 교회는 재건과 부흥에 힘썼다. 그러나 곧 장로교회 안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분열이 생겼다. 원인은 복합적인 것이기는 하나 대체로 신학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으로 집약된다.
신학적인 원인은 광복 이전의 보수단일신학(保守單一神學)과 거기에 수반된 보수적 교권이 광복 후에 진보적인 새 신학사상과 충돌한 데 있었으며, 정치면에서는 표면상으로는 신학사상을 앞세웠지만 실제는 교권장악을 위한 분쟁에 있었다.
이러한 분열은 특히 보수파 장로교회 안에서 주로 생겨났다. 그 첫번째로 나타난 분파가 고신파(高神派)의 분립인데,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에 항거한 장로교인들 가운데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목사 · 장로 · 전도사들이 경상남도에서 목사 한상동(韓尙東)을 중심으로 교회재건을 위하여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일제치하 때의 전향문제, 신앙보수의 문제들이 엇갈려 경남노회 내에서 분쟁이 일어났고, 이것이 총회로 비화되어 1952년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중심의 교회들이 이탈, 독립적으로 노회와 총회를 조직함으로써 완전 분립되었다. 고신파 교회의 신학은 칼뱅주의신학 중에서 전통주의신학을 표방하고,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와 선교적 유대를 가지고 있다.
두번째가 기독교장로회의 분립이다. 이는 1947년 봄에 서울역 앞 동자동에 있던 장로교의 조선신학교에서 일부 학생들이 목사 김재준(金在俊)의 성서관(聖書觀)을 반대하여 일으킨 신학적 문제가 발단이 되어서 생긴 분립이다.
1935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 사건으로 폐교당한 뒤 우리 나라의 목회자 양성을 위해 교회지도자들이 한국교회 자력으로 1940년 4월 서울에 세운 신학교가 조선신학교였다.
그러므로 광복 직후 남한에서는 장로교의 유일한 총회 직영 신학교였는데, 김재준의 성서관을 반대하고 나선 학생들이 총회와 요로에 성명서를 발송함으로써 신학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결국 보수주의신학자 박형룡(朴亨龍)과 신 신학자 김재준 사이의 신학논쟁으로 확대되고, 이어 장로교 총회가 김재준의 신학, 특히 성서관을 조사하게 되었으나, 총회는 그를 이단으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와 박형룡의 남산신학교와의 합동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김재준을 제명하려는 보수세력은 1·4후퇴 후 월남한 서북지방의 목사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므로, 1952년 봄에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의 총회직영이 취소되었다.
한편, 김재준의 파직을 그가 속하여 있던 경기노회에 지시하였고, 또한 이 신학교 졸업생에게는 목사후보자격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결의가 장로교헌법에 위배됨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호소한 호헌운동이 일어났으나 총회는 호헌운동을 묵살하였으므로, 결국 조선신학교측과 호헌파가 합류되어 1953년 6월에 분립 총회를 열고 새 교단의 발족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생긴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복음과 학문과 양심의 자유, 노예적 의존사상의 배격, 세계교회운동인 에큐메니컬정신의 선양 및 그리스도의 전적인 복음을 인간생활 전면에서 살리는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고신파 장로교는 교회의 재건을 부르짖고 기성교회를 단죄하면서 도전하다가 총회로부터 배격을 받아 분립되었으며, 조선신학교측, 즉 기독교장로회는 신신학 또는 이단으로 몰려 총회로부터 분립되어 나왔다.
그리고, 남아 있던 장로교회는 박형룡을 중심으로 총회신학교를 세워 옛날 평양신학교의 재건을 실현하였으나, 신학교기지 매입문제를 둘러싼 사건과 세계기독교협의회(WCC) 탈퇴문제 등이 얽혀 다시금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즉, 교회기지 매입을 위해 선교부로부터 받은 3,000만 환이 대지구입도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없어진 데 대해 끝내는 박형룡이 책임을 지고 신학교에서 사임을 하게 되자, 박형룡의 옹호파와 반대파 사이에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이 무렵 미국에서 조직된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sm)라는 보수적 복음주의운동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컬운동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박형룡 옹호파는 현재의 WCC가 자유주의신학과 용공(容共)을 견지하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교단이 WCC로부터 탈퇴할 것을 강요하고 나왔다.
그들이 국내에서 1952년에 NAE를 조직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키우자, 마침내 1960년에 교단은 둘로 분열되어 박형룡측은 NAE파라고 불리고, 그 반대파는 에큐메니컬파라고 불렸는데, 이러한 명칭이 후에 합동파와 통합파라는 말로 바뀌었다.
이렇게 하여 합동파는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여 총회신학교를 세웠고, 통합파는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보수주의를 표방한 합동파에서는 계속 자체 내에서 신학적 분쟁이 생겼고, 그 분쟁은 으레 교권주의자들의 이용물이 되어 신학논쟁이 교회분열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총회신학교의 소장파 교수들의 신학은 반드시 박형룡의 신학사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러한 견해차이는 박형룡의 사망 후 더욱 심화되어 신학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논쟁의 새로운 술어는 이제까지의 전통주의라는 말을 대신하여 ‘복음주의’와 ‘신복음주의’라는 말로 논쟁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박형룡과 같은 정통주의자로서 그의 동역자였던 박윤선(朴允善)도 종국에는 총회신학교를 빠져나와 다른 신학교를 세웠다.
그 뒤에도 합동측 장로교 안의 분열은 가속화되어 1980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아래에 주류측 총회와 교단, 중립노회측 · 비주류측이 있고, 비주류측 아래에는 통암동측 총회와 교단, 방배동측 총회와 교단, 그리고 합동진리측이 있었으며, 방배동측 아래에는 다시 합동계승측 총회와 교단, 연합노회 총회와 교단이 있었고, 그 뒤에도 분열작용은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신학교는 난립되어 당국의 설립인가 없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다른 교파들의 분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고도 계속적인 것이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제외하고는 모든 장로교교단들이 한결같이 교단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라 표기하고, 그 총회횟수도 같아 일반신도에게 주는 혼란은 극심하였다. 그러므로 1978년부터 분열된 장로교의 재일치를 모색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협의회 내지는 연맹형식의 접근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1년 2월에 기독교장로회 · 통합측 장로회 · 합동측 장로교, 고신측 및 대신측 장로교회들이 한국장로교협의회 창립총회를 새문안교회에서 개최하고 협의회규약을 통과시켜, 그 해 9월에 소집된 5개 교단의 총회에서 채택됨으로써 그 뒤 5개 교단들 사이의 친교와 협력이 가속화되었다.
이 협의회의 목적은 지난 날의 쓰라린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는 협력과 협동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운은 1983년 미국의 연합장로교와 남장로교와의 일치에 자극을 받아 더욱 진지하게 추진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