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구는 몸치장을 하는 데 쓰는 도구이다. 장신구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풍습으로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주술적 의도에서 시작된 장신구 치장은 사회의 형성·발전과 더불어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신분의 표상이 되면서 한층 더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옥석을 갈아 만든 관옥이나 짐승뼈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되며, 삼국시대에 고도의 공예기술로 화려하게 만든 금·은·금동제 장신구가 널리 쓰였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제약으로 인해 화려하지 않고 질박한 형태로 전환된다.
고고학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럽에 있어서는 중기구석기시대에 장신구로 몸치레를 하였다. 이 시기의 장신구는 짐승의 뼈 · 뿔 등으로 만든 간단한 머리꽂이라든가 가슴걸이 등이었는데,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몸의 각 부분을 치레하는 여러 가지 장신구가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장신구가 발달한 것은 몸치레를 하여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욕구에서뿐만 아니라 다분히 주술적(呪術的)인 의도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회의 형성 및 발전과 더불어 장신구는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신분의 표상으로 한층 더 증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옥석을 갈아 만든 관옥(管玉)이나 짐승뼈로 만든 목걸이의 장식이 발견된다. 이는 보다 발전된 단계인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다양해지고,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도의 공예기술로 만든 화려한 금 · 은 · 금동제의 장신구가 제작되어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복식에 대한 국책상의 제약을 받아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한 장신구와는 달리 질소한 면을 띠게 되었다.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초기철기시대의 장신구는 삼국시대에 비하여 다양하고 화려하지는 못하나, 소박하면서도 간단한 재료로 만들어 몸의 각 부분을 치레하고 있다. 머리에서 몸체에 이르는 장신구는 다음과 같다.
① 뼈비녀:비녀는 머리카락의 흐트러짐을 방지하는 구실을 하는 두발용구의 하나인데 장식적인 의도도 다분히 지니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농포동패총(農圃洞貝塚)에서는 사슴의 뿔로 만든 비녀 2점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길이 15㎝, 굵기 1.5㎝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13㎝, 굵기 2.5㎝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결발의 풍습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인 태성리 제4호움무덤[土壙墓]에서는 물소의 뿔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비녀가 출토되었는데, 단면은 능형이고 길이는 9㎝, 너비 8.5㎜, 두께 6㎜이며 끝은 둥글게 다듬어졌다. 가운데는 2.1㎝이며 가늘게 양쪽에서 깎아 들어갔다. 제조수법이 매우 치밀하고 정교하며, 표면은 대단히 고르고 곱다. 실용성을 띠고 있으면서 장식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② 뼈빗:빗의 유품은 유럽에 있어서는 중석기시대부터 발견되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훨씬 뒤진 시기인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마산 성산패총(城山貝塚)에서 2점이 발견되었는데 쓰인 재료나 구조 · 형태는 거의 같다. 하나는 작은 것으로서 짐승의 굵은 뼈 한쪽을 세로로 잘라 직사각형의 골판(骨板)을 만들고, 아래쪽에 예리한 칼로 세로로 에어 5개의 빗살을 만든 것이다. 길이 4.3㎝, 너비 1.3㎝이며 5개의 빗살 중 중앙의 하나만 남아 있고 다른 것은 모두 부러졌다.
다른 하나도 생김새나 구조는 거의 같고 8개의 빗살이 있는데 그 중 길게 남아 있는 것은 중앙의 3개뿐이다. 제일 긴 빗살은 길이 5.5㎝나 되나 이것도 부러진 것이므로 원래는 더 길었을 것이다. 골판은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은 곱게 갈았다.
귀걸이[耳飾]가 발견된 예는 매우 드물다.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북창 대평리유적(大坪里遺跡)의 제1호돌관무덤[石棺墓]에서 약간의 아래턱뼈편[下顎骨片]이 남아 있던 북쪽에서 2개의 부정형곡옥(不定形曲玉)이 출토되었다. 또 제4호돌관무덤에서 턱뼈편[顎骨片]의 좌우에서 각각 1개씩의 곡옥이 출토되었으며, 제9호돌관무덤에서 아래턱뼈의 양곁에서 각각 1개씩의 곡옥이 출토되었다.
이 곡옥들이 드러난 위치로 보아 귀걸이임이 틀림없다. 제1호돌관무덤에서 출토된 귀걸이는 천하석제(天河石製) 곡옥으로서, 그 중 하나는 두 군데에 에운 자리가 있는 것으로 길이는 1.55㎝이고, 다른 하나는 긴 능형인데 길이는 1.55㎝, 너비는 0.9㎝이다.
제4호돌관무덤의 것은 각별히 푸른빛이 많이 도는 천하석을 써서 만든 것으로서 곡옥의 형태가 뚜렷하다. 한쪽 것은 길이 2.6㎝, 너비 1.4㎝이고 안쪽으로 세 곳에 에운 자리를 냈으며, 마치 벌레 모양으로 보인다. 위에는 양쪽에서 맞뚫은 구멍이 있다.
다른 하나는 길이 3.1㎝, 너비 1.2㎝, 두께 0.5㎝로서 구멍이 있는 쪽으로 가면서 얇아졌고 안쪽으로도 얇아졌다. 맞뚫린 구멍 윗부분에는 끈을 매기 좋게 홈이 나 있다. 제9호돌관무덤의 것은 하나는 에운 자리가 있고 길이 1.8㎝이며, 다른 하나는 길이 1.6㎝이다. 두께는 모두 0.6㎝밖에 되지 않는다.
다음 초기철기시대에 속하는 운성리유적(雲城里遺跡)의 제6호움무덤에서 남색 유리로 만든 귀걸이가 출토되었는데, 생김새는 긴북 모양[長鼓形]과 비슷하다. 그리고 제7호움무덤에서도 한 쌍이 출토되었다. 이 두 시기의 귀걸이는 천하석으로 만든 곡옥형이고, 다른 것은 유리로 만든 긴북모양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의 목걸이[頸飾]에 쓰인 수식품은 여러 개가 발견되었으나, 드리우는 데 쓰인 재료가 유기질의 끈이어서 썩어버렸기에 전체의 형태는 알기 어렵다.
신석기시대의 목걸이에 쓰인 수식품에는 짐승이빨 · 뼈관옥 · 옥석관옥 · 옥부(玉斧) · 패각원형식 등이 있다. 짐승이빨의 것으로서 서포항유적(西浦項遺跡)에서 출토된 유품은 납작하게 갈고 한쪽에 구멍을 뚫어 매달 수 있게 하였다. 외관은 곡옥 같이 보이고 길이 2.5㎝ 정도이다.
또 같은 유적의 제4기층 제21호집자리[住居址]에서 드러난 것은 짐승이빨의 한쪽에 구멍을 뚫고 머리 쪽 부분에 작은 원형의 홈을 여러 개 파서 장식한 것이며, 길이는 3.8㎝ 정도이다. 또 궁산유적(弓山遺跡)에서는 옥부가 발견되었는데, 옥석으로 납작한 도끼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길이 3.0㎝, 너비 1.0㎝, 두께 0.6㎝이며 감람색(橄欖色)을 띠고 있다.
이밖에 뼈 또는 옥석으로 만든 관옥이 있는데 북창대평리 제9호 돌관무덤의 턱뼈 아래에서 출토된 곡옥 1개는 그 위치로 보아 목걸이임에 틀림없다. 뼈관옥으로서 무산 호곡유적(虎谷遺跡)의 것은 새다리뼈를 잘라 만든 것이고, 궁산유적의 것은 길이 3.0㎝, 지름 0.8㎝이다. 옥석으로 만든 관옥으로서 궁산유적에서 발견된 것은 대추 모양과 비슷하고 세로로 구멍이 뚫려 있는데, 크기는 길이 2.3㎝, 지름 1.0㎝, 양쪽 구멍의 지름은 4, 5㎜이다.
춘천 교동유적(校洞遺跡)의 유품은 백마노제(白瑪瑙製)이며 반투명의 유백색에 황록색 반점이 약간 섞여 있고, 길이 11㎝, 지름 1.5∼1.7㎝의 통형관옥(筒形管玉)이다. 이 밖에 조가비를 둥글게 가공한 것이 궁산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미송리유적(美松里遺跡)에서는 벽옥계통(碧玉系統)의 옥석제인 곡옥형 수식이 출토되었는데, 흰색을 띠고 전면을 잘 갈았으며 한쪽에 구멍이 뚫려 있다. 크기는 길이 16㎜, 너비 7㎜, 두께 4㎜의 작은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목걸이에는 천하석제곡옥 · 청석곡옥 · 뼈관옥 · 벽옥제관옥 · 점판암제관옥 · 의회암제관옥 · 공작석제관옥 · 마노제평옥 등이 쓰였는데, 나진 초도유적(草島遺跡)에서는 동제관옥(銅製管玉)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모양의 구슬들은 곡옥과 같이 한 개를 달아매는 경우와 여러 가지 구슬을 한 줄에 꿰어 목걸이로 하는 경우가 있다. 송국리 돌관무덤의 경우는 2개의 곡옥과 17개의 관옥을 섞어서 꿰어 한 줄의 목걸이를 구성하였다. 1개의 곡옥 또는 관옥이 발견된 경우는 곡옥 또는 관옥 1개를 끈에 매달아 펜던트(pendant)와 같이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뚜렷한 형태로 제작된 곡옥은 한때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하였으나, 매우 이른 시기인 신석기시대의 미송리유적에서 출토된 벽옥 계통의 옥석제 부정형 곡옥에 의하여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청동기시대의 목걸이를 살펴보면 구슬의 종류에는 다면옥(多面玉) · 대추모양옥[棗玉] · 둥근옥[丸玉] · 관옥 등이 있으며, 이밖에 마산 성산패총에서는 흙으로 만든 구슬, 사슴의 어금니로 만든 곡옥 모양의 것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재료도 다양해져서 유리 · 수정 · 마노 · 호박(琥珀) · 활석(滑石) · 백토(白土) 등이 쓰였다.
그리고 목걸이의 구성도 다양해져서 운성리유적의 제2호움무덤에서는 둥근유리구슬이 44개나 출토되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많은 구슬을 끈에 꿴 목걸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초기철기시대에 있어서도 앞의 시대에서 쓰던 뼈구슬은 계속 이어져서 무산 호곡유적에서는 길이 2㎝ 미만, 지름 2㎜ 정도의 구멍이 세로로 뚫려 있는 관옥이 출토되었다.
목걸이와 흉식(胸飾)은 드리우는 길이에 의하여 구분되겠으나, 드리우는 데 쓰인 재료가 유기질의 끈이어서 썩어버렸기 때문에 그 분간은 매우 어렵다. 그 유품으로 추정되는 것이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원수대패총(元帥臺貝塚)에서 발견되었는데 조가비제품이다.
길이 4, 5㎝ 되는 타원형에 가까운 조가비에 둥근 구멍을 뚫은 것으로서 팔찌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목에서 가슴으로 드리운 흉식장식으로 보고 있다. 또 청동기시대의 것에는 웅기 비파도유적(琵琶島遺跡)에서 출토된 도끼 모양의 유공석기(有孔石器)를 연상하게 하는 패옥(佩玉) 2개가 알려져 있다.
손목에 팔찌[腕飾]를 끼는 습속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이미 그 유품이 드러났다. 신석기시대의 서포항유적 · 웅기 송평동유적 · 김해 수가리유적 등에서는 조가비의 복판 부분을 깬 다음에 갈아서 고리로 만든 조가비팔찌[貝輪]가 출토되었는데, 그 형식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조가비의 복판 부분을 깬 다음 갈아서 고리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가비의 전체 3분의 1 정도가 없고 양쪽 끝이 뾰족한 것인데, 이것은 두 개를 마주 이어서 손목에 끼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옥제팔찌와 청동제팔찌가 쓰였는데 창효리의 움무덤에서는 너비 1㎝ 정도의 청동판을 감아서 만든 팔찌가 출토되었다.
또 회령 연대봉유적(煙臺峰遺跡)의 제4호움무덤에서는 유백색(乳白色) 반투명의 마노팔찌가 출토되었는데, 그 바깥지름은 5.78㎝이다. 또 무산 호곡유적의 제19호집자리에서는 연옥(軟玉)팔찌가 출토되었는데, 검은 반점이 어울린 흰 연옥으로 만든 고리 2개이다.
하나는 지름 9.6㎝이고 다른 하나는 4.9㎝이다. 본래 얇은 원판형의 연옥판을 밖에서부터 도려낸 제품인데, 큰 팔찌는 두 쪽으로 이루어졌으며 비끌어 매어 쓰기 위하여 부러진 양쪽 끝에 2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초기 철기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팔찌는 모두 청동제이다. 무산 호곡유적의 제17호집자리에서 드러난 것은 청동을 단순히 감아서 만든 팔찌이고, 마산 성산패총에서 드러난 것은 복원하니 안지름이 7.5㎝나 되었다. 이밖에 영천 어은동유적에서는 청동팔찌 8개가 발견되었다.
반지[指環]는 삼국시대에 특히 널리 쓰였다. 선사시대의 것으로는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나진 초도유적의 움무덤에서 출토된 청동판을 감아서 만든 청동반지가 있다.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운성리유적의 제3호움무덤과 무산 호곡유적의 제17호집자리에서도 각각 청동반지가 출토되었고, 태성리유적의 제4호목관움무덤에서는 은선(銀線)을 가지고 한 겹으로 만든 지름 2㎝, 두께 1.5㎝의 은반지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유물로 보아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 습속 또한 이른 시기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신구의 발달과정에 있어 가장 화려하고 뛰어난 공예기술로 장신구를 만든 시기는 바로 이 시대라고 하겠다. 오늘날 그 유품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이 시대이다.
삼국시대에는 각 나라가 모두 각기의 특색을 지닌 관모(冠帽)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관으로서 알려진 것은 평양 청암동토성지(淸巖洞土城址)에서 발견된 투각불꽃무늬금동관[透刻火焰文金銅冠]이다. 이 금동관은 넓은 금동관대에 투각한 불꽃무늬입식[火焰文立飾] 9개를 세우고 양쪽에 옷고름 같은 수식을 각각 하나씩 단 형식의 것이다.
또 평양 부근의 고분에서 출토된 투각초화무늬금동관[透刻草花文金銅冠]이 있다. 너비가 좁은 금동관대에 초화무늬를 투각한 금동입식을 앞면과 옆쪽에 각각 하나씩 세우고, 뒷면 좌우에 방형장식을 각각 하나씩 붙인 형식의 것이다. 이 금동관의 모습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보는 절풍(折風)과 흡사하다. 이 밖에 대동군 화성리의 고분에서 출토된 투각한 반달 모양의 앞면 입식이 있다.
백제의 관모에는 나주 신촌리의 제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이 있는데, 관은 넓은 관대에 앞면과 좌우 옆면에 각각 하나씩 초화형입식을 세우고, 전면에 원형의 작은 영락을 달아매었고, 모(帽)는 2매의 반원형 금동판을 맞대고 복륜을 둘러 고정시킨 산 모양[山形]의 것으로, 금동판의 측면에는 파상무늬와 당초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그리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금제전후관식(金製前後冠飾)은 얇은 금판을 오려서 투각 무늬를 새긴 불상의 광배 모양의 불꽃형을 이룬 것이다.
신라의 관모에 있어 지금까지 알려진 금관은 너비가 좁은 관대에 입식 5개를 세운 형식의 것인데, 앞면과 좌우 측면의 입식 3개는 좌우로 작은 가지가 뻗어 3단 또는 4단의 연속 산자형(山字形)을 이루고 있으며, 뒷면의 좌우 측면에 세운 입식 2개는 파상(波狀)으로 굴곡하고 좌우로 뻗어 나가 서로 엇갈린 녹각형(鹿角形)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관대와 입식의 전표면에 원형의 영락과 비취제 곡옥을 금실로 매어달았다. 이런 형식의 금관은 금관총 · 황남대총 · 금령총 · 서봉총 · 천마총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신라금관의 시원형식으로 볼 수 있는 경주 교동고분(校洞古墳)에서 출토된 금관은 그 형식을 약간 달리하고 있다. 이 금관은 관대에 입식 3개를 세운 형식의 것으로서, 앞면과 좌우 측면에 각각 1개씩 세운 입식은 아랫부분이 넓고 중간으로부터 윗부분에 이르러 3개의 가지로 갈라지며, 관대와 입식의 전표면에 원형의 영락을 금실로 매어달아 장식하였다.
가야의 관에는 금관과 금동관이 있는데, 양산 부부총(夫婦塚), 대구시 비산동 제37호분 등에서 출토된 것은 신라의 금관과 그 형식이 같으나, 의성 탑리고분(塔里古墳)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그 형식이 특이하다. 이 금동관은 좁은 관대에 3개의 입식을 세운 형식의 것인데, 입식의 끝은 보주형이고 좌우 양측의 가장자리는 우모(羽毛) 같이 생겼다.
그리고 고령부근의 고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금관은 넓은 관대에 초화형의 입식 4개를 세운 형식의 것이다. 특히 신라와 가야고분에서는 새 모양 또는 새날개 모양의 관모 전입식이 출토되었는데 금제 · 은제 · 금동제 등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유품에는 머리카락을 고르게 빗는 데 쓰인 빗과 결발에 쓰인 비녀, 결발과 장식의 구실을 한 머리뒤꽂이가 있다.
빗은 신라고분인 금령총 · 식리총 · 호우총 · 천마총 등에서 출토되었는데, 모두 나무빗으로서 옻칠을 하였고 산 모양을 하였으며 빗살은 가늘고 비교적 긴 편이다. 비녀는 신라의 은령총과 백제의 부여 성양리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있는데, 은령총의 것은 능형의 돌기가 달린 구체(球體)의 금제 두부(頭部)만 남아 있다.
백제의 것은 금장식한 은제비녀로서 몸은 약간 구부러지고 머리 부분에는 금제오판화장식(金製五瓣花裝飾)을 단 것이다. 머리뒤꽂이는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되었는데 삼각형의 머리 부분과 세 가닥의 다리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삼각형의 머리 부분은 두 날개를 펼친 새모양을 하고 있고, 세 가닥의 다리 부분은 새꼬리 모양을 하고 있어 전체 모양은 나는 새의 형상과 같다.
귀걸이는 다른 시대에 비하여 특히 삼국시대 때 남녀의 구별 없이 널리 쓰이고 애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귀걸이는 크게 세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고리 1개로만 된 소환식(素環式)이고, 다음은 금제세환에 작은 고리 1개를 연결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주환에 중간식이 연결되고 중간식에 다시 수하식이 이어진 것이다.
첫째와 둘째 형식의 귀걸이는 그다지 흔하게 발견되지 않으나, 셋째 형식의 귀걸이는 발견된 예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귀걸이에 쓰인 재료는 금 · 은 · 금동 등이나 금으로 만든 것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귀걸이를 구성한 각 부분을 보면 주환은 굵은 태환(太環)과 가느다란 세환(細環)이 있고, 중간식에는 아주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만든 화롱형구체(花籠形球體)의 것이 있다.
또 화롱형 구체의 수법으로 만든 반구체(半球體)를 위아래로 연결한 것, 화롱형구체의 위아래에 반구체를 연결하고 화롱형 구체의 복부에서 방사형으로 작은 영락이 돌출된 것, 금속판으로 만든 원통형의 것, 중앙은 원통형이고 그 위와 아래에 주산알 모양의 것을 연결한 것 등이 있다.
또 수하식에는 세로로 긴 심엽형 1매의 것, 1매의 심엽형 앞뒤에 작은 심엽형을 달아맨 것, 비취제곡옥 1개의 것과 금모를 씌운 곡옥의 것, 초실형(草實形), 원추형, 역사각추형, 금제구슬 3개를 이어 달아맨 연주형(連珠形) 등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특히 셋째 형식의 귀걸이 중에서 경주 보문리 부부총에서 출토된 태환식 귀걸이는 태환에 귀갑문을 새겼는데, 그 정교하고 화려함은 우리나라 귀걸이 중 으뜸이라고 하겠다. 대체로 신라 귀걸이의 수하식은 심엽형이 주류를 이루고, 가야의 것은 초실형이 많다.
목걸이에는 1줄인 것, 2줄 또는 3줄인 것, 4줄 아니면 6줄인 것 등이 있다. 그리고 재료와 구조에 의하여 구분하면 금줄로 된 것, 금제 중공옥으로 된 것, 옥류를 연결한 것, 금옥과 각종 옥으로 이루어진 것 등이 있다. 이러한 목걸이는 고분에서 출토될 때 매장된 시체의 목에 걸려 있는 모양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금줄로 된 것에는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목걸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금줄 토막의 양쪽 끝을 꼬아서 고리를 만들어 9토막을 연결한 금제9절목걸이이고, 다른 하나는 일곱 토막의 금제7절목걸이이다. 이러한 형식의 목걸이는 황남대총의 남분에서도 출토되었다.
금제 중공옥으로 된 것에는 경주시 노서동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있는데, 화롱형 구체에 영락을 매단 중공옥 77개를 연결하고 그 중앙에 비취곡옥을 수식한 것이다.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우리나라 목걸이의 걸작이라고 하겠다. 이 형식의 목걸이에 쓰인 옥에는 곡옥 · 환옥 · 대추형옥 · 다면옥 · 관옥 등이 있으며, 그 재료는 비취 · 유리 · 수정 · 마노 · 진주 등이다.
그리고 금옥과 각종 옥으로 이루어진 목걸이는 1개의 곡옥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환옥으로 이루어진 것, 1개의 곡옥을 중심으로 각종 옥과 금제옥이 섞여서 이루어진 것, 1개의 곡옥을 중심으로 수정제 다면옥으로 이루어진 것 등이 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푸른색의 유리옥을 이어 꿰어서 1줄 또는 2, 3줄로 하고, 중심부, 즉 가슴의 중심에 닿는 위치에 1개의 곡옥을 단 것이다.
목걸이로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신라의 특이한 유품을 살펴보면 경주 황남동 미추왕릉지역 C지구 제4호분에서 드러난 상감유리옥부목걸이[象嵌琉璃玉附頸飾]를 들 수 있겠다.
이는 청색유리환옥 29개와 홍색마노환옥 · 다면옥 16개, 그리고 청색관옥 1개로 이루어진 목걸이의 중심수하부에 유리환옥 · 수정대추옥 · 홍색마노공옥이 각각 1개씩 달려 있다. 이 밑에 달린 유리옥 속에는 인물상 · 오리 · 수초 · 구름무늬 등이 천연색으로 상감되어 있다.
또 투명한 수정옥으로 이루어져서 맑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목걸이가 금령총에서 출토되었다. 이 목걸이는 주산알 모양의 수정다면옥 38개와 수정옥 1개로 이루어졌는데, 중심에 단 수정옥에 가까울수록 수정다면옥은 크고 길다.
그리고 가야의 양산부부총에서 출토된 부인의 유품인 목걸이는 삼국시대 목걸이의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 목걸이는 목 뒤에 닿는 부분은 은줄로 되었고, 중앙에 홍색마노곡옥 1개를 배치하고 좌우에 균형있게 수정다면옥 · 홍색마노치자옥 · 금제공옥 · 홍색마노관옥 · 금제공옥 · 홍색마노관옥 · 금제공옥 · 홍색마노관옥 · 금제공옥 · 홍색마노관옥 · 홍색마노다면옥 · 유리다면옥 · 홍색마노다면옥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모양의 옥을 연결한 목걸이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목걸이에 있어 삼국시대에는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것들을 사용하였다.
흉식의 유품은 신라의 고분인 금령총 · 서봉총 · 천마총 · 황남대총 등에서 화려, 찬란한 것이 출토되었다. 금령총의 유품은 유리환옥 152개로 이루어진 것인데, 경옥제곡옥 1개를 중심으로 환옥을 연결한 줄 4줄을 늘어놓고, 다음에 심엽형 영락을 매단 금제간 6개을 두고, 다시 은제공옥 48개 및 금제공옥 88개를 4줄 늘어놓은 것이다.
또 서봉총의 유품은 곡옥 1개를 중심으로 유리환옥 · 금제공옥 · 은제공옥 · 금제간을 늘어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것은 천마총에서도 출토되었다. 황남대총의 것도 그 구조는 위의 것들과 비슷하나 중간의 좌우에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금제간을 늘어놓고 그 사이사이에 유리옥을 배치하여 보다 화려하다.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귀걸이 · 반지 등과 함께 팔찌도 유행한 장식품의 하나였던듯 이 시기의 고분에서는 여러 개의 유품이 출토되고 있다. 출토된 팔찌에는 옥류 · 유리제 · 금속제 등이 있다.
금속제팔찌에는 금동제 · 은판피청동제 · 은제 · 금제 등이 있다. 여러 가지 옥을 연결하여 만든 옥팔찌로는 신라의 금령총에서 출토된 유리옥 28개를 연결한 것과 경옥제곡옥 1개에 마노색 · 주황색 · 청색 등의 유리옥을 여러 개 연결하여 만든 것이 있다.
또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모곡옥과 유리옥으로 된 것이 있다. 가야의 양산부부총에서도 2점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마노옥 55개를 연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노옥 23개와 유리옥 23개, 금동은제공옥 2개로 이루어진 것이다.
유리팔찌는 신라의 서봉총에서 출토되었는데 파손이 심하여 원형을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바깥지름 약 7.5㎝의 원형으로서 팔찌의 단면은 둥글고 비교적 굵으며 녹색 광택을 띠고 있다.
동제팔찌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유품이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의 대성산 식물원구역 제4호분에서 출토된 유품은 단면이 원형이고 굵기 5㎜의 청동쇠줄을 지름 6.8㎝ 크기로 둥글게 만든 극히 단순한 것이다. 만달산록 제15호분의 것은 표면둘레에 톱니 같은 돌기를 장식한 것이다. 백제의 신촌리 제9호분과 대안리 제9호분에서 출토된 유품은 표면둘레에 톱니 모양의 돌기가 장식된 것이다.
신라의 보문리고분에서 출토된 것도 표면둘레의 장식은 앞의 것과 같으나 한쪽 부분이 갈라져 있다. 은팔찌에 있어 고구려의 유품은 2점이 알려져 있는데, 하나는 용강군 후산리 추동 제9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서 단면이 원형이고 굵기 3㎜의 은쇠줄로 간단하게 구부려 만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용강군 후산리 내동 제4호분의 것으로서 단면은 모를 죽인 구형의 납작한 것이고 정원을 이루고 있다.
백제의 것에는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유품이 있다. 이것은 표면 안쪽 둘레에 톱니 모양의 점열을 두르고 표면 중앙 둘레에는 두 마리의 용을 양각하였는데, 용은 머리를 뒤로 돌리고 혀를 길게 내민 형태이다.
그리고 안쪽 면에는 경자년(庚子年) 2월에 다리(多利)가 만들었다는 음각명이 있는데 명이 새겨진 팔찌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이 왕릉에서 출토된 또 다른 팔찌는 3토막의 은봉과 1토막의 금봉을 연결한 4토막으로 구성된 팔찌이다.
신라의 은팔찌 중에는 표면에 톱니 같은 돌기를 장식한 것도 있으나, 식리총의 유품은 표면 둘레에 구슬무늬를 새기고 보문리고분의 것은 주옥 같은 무늬를 새겼다. 가야의 유품에는 표면둘레에 톱니 모양의 장식을 한 것들이 있으나, 고령 지산동 제39호분에서 출토된 유품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환(素環)의 것이다.
금팔찌도 여러 개가 알려져 있는데 백제의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품은 표면둘레에 톱니같이 돌기를 장식한 것이다. 신라의 유품도 대부분 이러한 형식의 것이나, 금령총에서 출토된 것은 표면 측면에 40개의 꽃 모양 좌판을 만들고 유리옥을 박아 장식한 것이다. 경주 노서동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표면에 59개의 원형돌기를 장식하고, 돌기를 제외한 전면에는 여러 마리의 용이 엉켜 돌고 있는 용무늬가 양각되었다.
또 황남동패총에서는 누금팔찌가 출토되었는데, 상하단을 말아붙인 금판으로 된 고리의 표면에 다시 1장의 금판을 덧대고 그 표면을 누금세공으로 처리하였으며 청옥 · 남색옥 등을 감입하였다. 양산부부총에서 출토된 금팔찌는 표면 측면에 타원구(楕圓球)를 장식하였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풍습은 고구려 · 백제 · 가야에서는 크게 성행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각종 다량의 호화 부장품이 드러난 백제의 무녕왕릉에서 한 점의 유품도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고, 고구려 · 가야의 많은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으나 지극히 적은 양만 출토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반지에는 청동제 · 은제 · 금제 등이 있다.
청동반지는 고구려의 안학궁지 제2호분에서 출토되었는데, 너비 4㎜, 두께 1㎜의 청동쇠줄을 타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것으로서 윗부분은 너비가 1㎝이며 넓게 만들어져 있다.
은반지는 여러 개가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의 평양역전이실분에서 출토된 것은 굵은 은쇠줄을 되는 대로 휘어 만든 소박한 것이고, 약수리 벽화고분의 것은 얇은 은판을 썰어 만든 것으로서 일회반이나 은판을 돌렸기 때문에 반지의 두 끝이 맞물리지 못한 조잡한 것이다.
백제의 공주 우금리고분의 것은 반지의 두 끝이 맞물리지 못하였으나 표면을 섬세한 직선으로 장식하였다. 신라의 은반지는 여러 개가 알려져 있으나 그 생김새는 거의 동일하여 윗부분의 중앙이 마름모꼴을 한 넓은 형태이다. 가야의 양산부부총에서 출토된 유품도 역시 윗부분의 중앙이 마름모꼴을 한 넓은 것이다.
금반지는 윗부분이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대부분이나, 경주 노서동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테두리 가장자리를 누금장식으로 두르고 윗부분은 넓으며 누금세공으로 사판화형좌판(四瓣花形座板)을 배치하였다.
금령총의 유품은 마름모꼴의 윗부분에 다시 마름모꼴의 누금장식을 배치하고 그 안에 칠보유리옥을 감입한 것이다. 신라의 금반지는 화려하고 발달된 세공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과대(銙帶)와 요패(腰佩)에는 금동제 · 은제 · 금제 등이 있는데, 가장 화려한 유품은 신라의 금관총 · 서봉총 · 금령총 · 천마총 · 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금제이다. 은제에는 백제 무녕왕릉의 유품이 있고, 금동 · 은제에는 양산부부총의 것이 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과대는 당초무늬를 투각한 방형좌판에 당초를 투각한 심엽형 수식이 달린 과판 40매를 가로로 연결하고 그 양 끝에 교구(鉸具)를 단 형식이다.
이 과대에 드리운 요패는 17줄로서 3줄은 금사슬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중심이 오므라 들어간 타원형금판을 방형판으로 이어 그 끝에 장규형금판 · 각통형 · 고기모양 · 곡옥 · 6각형투각금판 등의 수식을 달아맨 것이다. 그리고 과판의 표면과 요패 중 가장 크고 긴 것에는 원형의 영락을 장식하였다. 다른 금제과대와 요패도 거의 이와 동일한 형식이다.
은제과대와 금은제요패는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과대는 표면이 오므라 들어가고 좌우 양측에 귀가 달린 타원형의 대형과판을 같은 형태의 소형과판으로 연결하고, 한쪽 끝에는 환두형교구를, 다른 한쪽 끝에는 7화형금구를 단 형식이다.
금은제요패는 도금한 타원형의 은판을 소형의 타원형판으로 연결하고, 위쪽 끝에는 두꺼비를 투조한 5각형금구를, 아래쪽 끝에는 귀면을 투조한 방형판에 장방형판을 연결한 수식을 달아맨 형식이다. 이밖에 금동 · 은제의 것이 양산부부총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형식은 금제와 거의 같다.
금동식리(金銅飾履)는 실용품이 아니라 고분의 부장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동 · 은제의 것 이외에는 알려진 유품 모두가 금동제이다. 무령왕릉의 유품은 바닥과 옆판을 은판으로 먼저 만들고, 그 위에 인동당초무늬를 투각한 금동판을 씌운 것으로 바닥에 원형영락과 9개의 징을 박았다.
또 가야의 대구 내당동 제55호분의 것은 바닥과 옆판에 원형영락을 장식하였으며, 신라의 식리총의 유품은 바닥과 옆판에 그림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옆판에는 불꽃무늬를 양각하였고 바닥에는 새끼무늬띠를 두르고 안에 귀갑무늬와 일종의 금수무늬를 새겼다.
고려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진보된 사회였으므로 장신구의 패용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신라 · 가야와 달리 후장(厚葬)을 하는 관습이 없었기에 출토된 유물이 적어 그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의 기록을 토대로 이 시기의 장신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의 관모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것과 거의 비슷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면류관 · 원유관 · 청라관 · 복두 · 사모 등이 있다.
고려 말의 것이라고 믿어지는 금제 동곳이 있다. 크기와 형상이 각각 달라 그 의장의 다양함이 조선시대 때보다 훨씬 높음을 알 수 있다.
동곳 두부에 당초문을 음각한 것과 수정을 맨 것은 현재 보존된 고려의 금제 동곳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이다. 이 밖에 운작문음각(雲雀文陰刻) · 족부엽상문음각(足部葉狀文陰刻), 두부에만 조각한 것, 두부에 운문을 음각한 것들이 전해지고 있다.
도금한 동제의 것으로는 머리 부분에 봉황을 투각한 것과 닭머리 모양의 것이 있다. 봉황을 투각한 것은 왕비가 사용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도금한 은제 비녀는 두부가 화형이며 거기에 옥을 감장(嵌裝)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순금제이다. 구형소주(球形小珠) 3개를 연속시킨 것과 구형소주가 수식된 것이 있다.
고려시대 반지 중 뛰어난 것은 금제에 마노상보석이 감장되어 있는 것과 녹색보석이 박힌 것이다. 이외에 당초문을 양각한 순금제반지, 톱니문을 새긴 은제반지, 일부를 세조(細彫)한 은제반지, 무문의 동제반지 등이 있다.
고려의 과대(銙帶)는 금 · 은 · 동 등을 합금하여 여러 가지 형태를 상감하였으며, 특히 그 중에서 대모 · 마노 · 상아 · 오서(烏犀) · 백옥 · 미석(美石) 등을 사용하여 과판에 감입시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은 신라시대보다 앞선다. 그 형태는 금동으로 된 방형(方形)의 과판이 여러 개 붙어 있는 모양인데, 과판 하나하나에는 서조인 봉황과 꿩, 서수인 용 등이 음각 또는 양각되어 있다.
또 교구가 붙어 있는 과판에는 당초문 등의 수목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과판 이면은 그냥 민짜판인데 이는 포대(布帶) 표면에 붙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유리옥으로 만든 갓끈 1줄, 대모로 만든 빗 1개, 도금한 순은에 연화문을 음각하여 만든 머리장식 등이 전하여, 화려하고 다양하였던 고려시대 장신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국책상의 제약을 받아 장신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특히 숭유주의의 팽배는 비중국적인 습속을 극도로 배척하였기에 상고시대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 귀걸이 · 팔찌 등의 패용습속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아울러 금은의 사용을 적극 억제하는 시책은 찬란하였던 우리의 금은세공기술을 퇴보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장식이나 노리개 등은 다양하게 발달하여 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성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장신구는 크게 남자용과 여자용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 남자용 장신구는 머리를 단정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관모와 관련이 있는 상투관 · 관자 · 살쩍밀이 · 동곳 · 갓끈 등이 있고, 허리띠의 구실을 하는 광다회 · 세조대(細絛帶), 기타 장신구로 호패끈 · 선추 · 안경집 등이 있다.
여자용으로는 머리를 수식하기 위해 사용했던 각종 비녀와 여러 가지 형태의 뒤꽂이,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첩지와 떨잠, 그리고 머리를 단정하게 하기 위한 댕기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부터 거의 자취를 감춘 귀걸이가 있으며 가락지가 있었다. 그외에도 패물의 하나인 노리개 · 향갑 · 향낭 · 침낭 · 장도 등과 각종 주머니가 있었고, 원삼이나 여름철 적삼에 다는 단추도 장신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상투에 씌우는 관으로 왕과 사대부가 집안에서 사용하였으며 재료는 뿔 · 나무 · 종이 · 가죽에 흑칠을 하였다. 망건을 쓴 다음 상투관을 쓰며 비녀를 꽂아 상투를 고정시켰다.
망건은 상투를 할 때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마에서 뒷통수에 걸쳐 두르는 것이다. 주로 말총을 엮어서 만든다.
망건의 부속물인 관자와 풍잠의 재료에 따라 신분의 구별을 하기도 하였다. 관자는 망건을 졸라 매는 끈인 당줄을 걸어 넘기는 것으로 망건 위의 양 옆 관자놀이에 달려 있다. 권자(圈子)라고도 한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금 · 옥 등을 사용하고 정3품 이하 서민들은 골각 · 대모 · 마노 · 호박 등을 사용하였다. 말기의 유물을 보면 신분이 높을수록 금 · 옥 조각이 없는 간소한 관자를 사용하였다.
풍잠은 망건 앞에 다는 장식품의 일종으로 갓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상류층에서는 대모 · 호박 · 마노 등을 사용하였고 일반은 골(骨) · 각(角)을 사용하였다.
남자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쓸 때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살쩍)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망건 속으로 밀어 넣을 때 쓰던 물건을 말한다. 재료는 대나무나 뿔로 만들며 형태는 얇고 길다. 나비 1.5㎝, 길이 8∼10㎝ 정도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머리를 정돈하였다.
상투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기혼 남자의 머리장식품의 일종이다. 생긴 모양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현대의 머리핀 처럼 생겼다.
갓을 매는데 사용하는 끈으로 옥 · 마노 · 호박 · 산호 · 수정 · 밀화 · 헝겊 · 대나무 등의 여러 가지 재료가 사용되었으며 신분의 따라 차이가 있다.
각대는 조선시대 관복에 하던 띠로서 허리에 두르는 것으로, 신분에 따라 각각 그 재료가 달랐다. 주머니 · 매듭 · 띠 · 노리개 · 유소 등에 사용하는 끈은 다회라고 한다. 실을 합사하여 두가닥 혹은 세가닥 이상으로 꼬는 끈과 네가닥 이상의 여러 가닥으로 쳐서 짜는 끈으로 나뉜다.
광다회는 폭이 넓고 납작하여 평직으로 짜서 허리띠 등에 사용하였다. 세조대는 실을 엮어 끈으로 짠것으로 광다회에 비해 얇고 좁으므로 세조대라고 한다. 딸기술이나 봉술을 매달아서 마무리를 했는데 주로 전복 등에 씌였다. 품위에 따라 색깔을 달리 하여 당상관은 홍색 또는 자색을, 당하관은 청색 또는 녹색을, 서민은 흑색을, 상제는 백색을 띠었다.
조선시대 남자들의 신분증인 호패를 매달았던 끈으로, 신분에 따라 끈의 장식과 술의 모양이 달랐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사용하던 부채 끝에 달던 장식품이다. 백옥 · 비취 · 호박 · 나무 등의 재료에 십장생 등의 무늬를 조각하고 매듭으로 마무리한다. 선추 장식은 관직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안경을 넣어 보관하는 물건으로 지승(紙繩) · 나무 · 천 · 가죽 · 어피(魚皮) · 종이 등과 헝겊에 길상문 · 화문 등을 수놓아 만들기도 한다.
조선시대 여인에 있어 비녀는 쪽진 머리의 부녀자 수식의 하나로서 누구나가 다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녀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된 것은 조선왕조 후기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의 일이다.
임진왜란 이후 여성들의 머리모양이 다리[月子]를 사용하여 모양이 점차 화려해짐에 따라 여러번 사치금지령과 가체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잘 시행되지 않았다. 이에 영정조 시대에 궁중의 머리 모양인 쪽머리를 일반에도 허용을 하면서 다양한 비녀가 발달하게 되었다.
비녀는 재료에 따라 금 · 은 · 백동(白銅) · 옥 · 비취 · 산호 · 목(木나) · 죽(竹대) · 각 · 골비녀로 나누어지고, 비녀머리의 장식형태에 따라 봉잠(鳳簪) · 용잠(龍簪) · 원앙잠(鴛鴦簪) · 죽잠(竹簪) · 매죽잠(梅竹簪) · 죽절잠(竹節簪) · 연봉잠(蓮峯簪) · 목련잠(木蓮簪) · 목단잠(牧丹簪) · 석류잠 · 호도잠 · 말뚝잠 등으로 구별된다.
조선시대에는 뚜렷한 신분에 따라 금 · 은 보석으로 만든 비녀는 상류계층에서 사용할 수 있었고 서민층 부녀들은 목 · 각 · 골로 된 비녀만 사용할 수 있었다. 봉잠 · 용잠은 예장할 때 다래를 드린 큰 낭자 쪽에 꽂았고, 다른 것들도 비녀머리의 모양에 따라 그 재료를 달리하여 계절에 맞추어 큰 쪽에는 큰 비녀, 작은 쪽에는 작은 비녀를 꽂았다.
그 외에도 머리핀 같이 두 가닥으로 된 비녀가 있다. 이것은 가체 또는 머리에 다른 수식을 할 때 머리를 고착시키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꽂은 보조비녀의 일종이다. 주로 은으로 만들었으며 족두리 비녀로도 사용되었다.
헌종 때 경빈(慶嬪)김씨(金氏)의 『사절복식자장요람』에 보이는 비녀의 종류와 용도를 보면, “탄일과 정초문안에는 큰머리 칠보에 니사봉잠이나 옥모란잠 · 옥봉잠 · 옥원잠 · 니사연잠을 한다. 동지문안에는 니사봉잠이나 옥모란잠 · 옥입잠 · 봉잠을 꽂아도 좋다. 과세 정월망알(대보름)에는 용잠을 한다.”라고 되어 있다.
뒤꽂이는 쪽진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수식물을 총칭하는 것이다. 끝이 뽀죽한 단순한 뒤꽂이 이외에 실용적인 면을 겸한 귀이개 · 빗치개 · 뒤꽂이 등이 있었다. 그리고 뒤꽂이는 그 재료에서나 두식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으며, 궁 · 반가 · 일반의 품위 나름으로 우열을 가려 사용하였다.
뒤꽂이의 대표적인 것은 국화모양의 장식이 달린 과판이 있고 연꽂봉오리를 본 따 만든 연봉장식이 달린 것이 있으며, 이밖에도 매화 · 나비 · 천도 · 봉 등의 모양을 장식한 것들을 산호 · 비취 · 보석 · 칠보 · 파란 · 진주 등으로 꾸몄다.
빗치개는 원래 빗살 틈의 때를 빼는 도구이지만, 가리마를 갈라 머리를 정제하는데 필요할뿐더러 밀기름을 바르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다양한 질과 크기, 모양을 가지고 있다. 대개는 빗이나 빗접 · 면경 · 쪽집개 · 살쩍밀이 · 분통 등과 함께 경대에 간직해 두는 것이지만 쪽진 머리에 꽂아 머리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귀이개는 원래 귀지를 파내는 기구인데, 이것도 장식을 하여 쪽진 머리에 꽂았다. 한쪽은 둥글게 하고 몸체에는 여러 가지 장식을 한다. 보통 은칠보장식을 하고 뒤꽂이로 사용하기도 하여 장식과 실용을 겸하기도 하였다.
첩지는 부녀가 예장할 때 머리 위에 꾸미는 것이다. 첩지는 얹은머리에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 얹은머리 대신 쪽진머리를 하게 하고 이에 더하여 족두리를 하게 한데서 시작된 것이다. 그 역할은 수식하는데도 있고 족두리나 화관 같은 것을 쓸 때에 걸려서 고정시키게 하기 위한 역할을 겸하게 하는 데도 있다.
첩지에는 도금으로 만든 봉 첩지가 있고 도금 또는 은, 아니면 흑색으로 만든 개구리 첩지가 있는데 그 형태와 질로서 품위를 가리었다. 도금 봉첩지는 왕비의 것이고 기타의 것은 계급에 따라 내명부 또는 상류층 외명부들이 사용하였다. 첩지의 사용은 상류계층이라 할 지라도 예장을 갖출 때 이외에는 별로 하지 않았는데 궁중에서는 평상시에도 하고 있었다.
떨잠은 일명 떨철반자라고도 한다. 궁중의식 때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계급에 한해서 큰 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도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떨잠에도 원형 · 각형 · 접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어 큰머리나 어여머리의 중심과 양편에 하나씩 꽂았는데, 이것은 최고의 수식품으로 각종 형태의 옥판에 칠보 · 진주 · 보석 등으로 장식을 한다. 은사로 가는 용수철을 만들어 나비와 새 모양의 장식을 하는데 이것을 떨이라고 하며 이 떨이 있는 장식잠을 떨잠이라고 한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기 위하여 묶는 것에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끝이 뽀족하게 생겼다고 하는 제비부리 댕기는 처녀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주로 붉은 색 종류이며, 나이든 혼인한 사람은 자주색 댕기를, 과부는 검정색 댕기를 사용했다.
이 외에도 혼인할 때 예복과 함께 사용하는 패물로 장식한 큰 댕기(도토락 댕기)가 있으며, 족두리나 화관을 착용할 때 큰댕기와 함께 앞에 드리는 앞 댕기가 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귀걸이 하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이는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며, 중국의 왕회도(王會圖)에 그려진 백제와 고구려인은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이 귀걸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으로 중국사람들에게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은 원래 이식을 몰랐다가 이족(夷族)으로부터 전래받아 귀걸이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여 이식이 중국인들의 것이 아니라 해서 조선왕조 후반기에 모화사상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여인들에게도 이식의 풍습이 없어져 갔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 중 이당변증설(耳鐺辨證說)에서 “부녀의 장식용품은 매우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귀걸이[耳鐺]이 있다. 그리하여 사대부가의 초례는 이당을 사용하는데 귀에 걸 뿐 이었다. 그런데 송도와 양서에서는 반드시 귓볼을 뚫고 작은 동환(銅環)을 꿰었는데 이는 이족(夷族)의 풍속이 아직 남아 있는 까닭이며, 다만 필부와 천녀가 그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賻)』에서는 상류계급이나 하류계급이 똑같이 하고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느냐고 이를 나무라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도 이 풍속은 있었던 것이다. 『수고집』을 보면 선조 5년(1572) 임신에 정원에 전교하여 말하기를 신체발부는 이를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훼상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라 하였거니와, 우리나라의 대소 남아는 반드시 그 귀를 뚫고 귀걸이를 만들어 걸고 있어 중국의 나무람을 받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당시에는 여자만이 귀를 뚫은 것이 아니라 남자도 또한 그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풍습은 고려로부터 흘러 내려왔는데, 고려는 즉 몽고의 호풍(胡風)에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선조 조까지는 그 형태야 어떻든 간에 남녀를 막론하고 귀고리로서 이식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선조의 효시가 있은 후 우리나라 여인들의 이식은 그 모습을 달리하여 귀걸이로 바뀌게 되었으며, 평상시에 이식하는 습속은 그 자취를 감추어 갔던 것이며, 더욱이 남자의 이식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시대 후반기 이식의 특징은 고대의 귀고리 모양, 즉 귓 볼을 뚫어 꿰는 것이 아니고 귀걸이를 만들어 귓바퀴에 걸게 되어 있으며, 그 장식도 단조롭고 때로는 여기에 단조로움을 보완하기 위하여 오색의 술이 달려 있기도 하였다. 이는 1930년대 개성과 평양지방에서는 혼례식 때 신부가 화려한 오색 술이 달린 큰 귀걸이를 한 사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지환에는 가락지와 반지가 있다. 흔히 말하는 쌍가락지는 가락지라고 하고 하나만 끼는 것은 반지라고 한다. 조선시대 지환은 도금 또는 은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궁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밖에 칠보 · 옥 · 마노 · 호박 · 비취 · 진주 · 동으로 만든 것이 있어 그 종류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끼기도 하였다.
조선 헌종의 후비였던 경빈 김씨의 『사절복식자장요람』에 나타난 지환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월부터 정월까지는 금지환을 끼고, 이월 · 사월은 은파란지환, 오월 단오 초사 당한삼 입을 때는 옥지환이나 마노지환을 끼고, 팔월 하순에는 광사 당져고리 입을 때부터 구월 공단 저고리 입을 때까지 파란 지환을 낀다. 규칙이 이러하여 여름에는 직금(織金)옷을 입을 때 외는 금지환을 못 끼고 겨울에는 옥지환을 못 낀다. 봄 가을에는 때에 따라 아무 것이나 사용할 수 있다.” 즉 겨울에는 금지환, 여름에는 옥지환을 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노리개는 여자의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에 차던 패물 장식품이다. 노리개는 맨 위에 노리개를 고름에 거는 띠돈, 노리개의 몸체, 이들을 띠돈에 연결하는 끈목, 매듭, 술로 구성된다.
크기에 따라 대삼작, 소삼작, 중삼작으로 구별하는데, 대삼작 노리개는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 달던 것이다. 노리개는 세 개를 함께 패용하는 삼작노리개가 대표적이며, 하나만 착용하는 단작노리개 등이 있다.
재료로는 금 · 은 · 동 · 백옥 · 비취 · 자모노 · 홍옥 · 공작석 · 밀화 · 산호 · 진주 · 금패 · 대모 · 호박 · 색사(色絲) · 주단 · 금은사 등이 사용된다. 형태에는 동자 · 박쥐 · 거북 · 붕어 등의 동물형태와 가지 · 고추 · 포도송이 · 천도 · 석류 등의 식물형태, 그리고 호로병 · 주머니 · 방아다리 · 투호 · 장도 · 종 · 표주박 · 북 · 장구 · 안경집 · 자물쇠 · 도끼 · 버선 · 방울 · 석등 · 벼루 · 각종문자 등 생활주변에서 얻은 형태가 있다. 따라서 길상적인 문양을 택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부귀 다남, 복, 장수를 뜻하는 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노리개는 계절에 따라 재료를 달리하였음을 헌종 때 경빈 김씨가 쓴 『사절복식자장요람』에 나타나 있다. “춘추와 여름에는 구슬과 옥노리개 차고, 겨울은 옥접한 향이나 마노 · 밀라 향접한 종류를 찬다. 규칙은 이렇지만 향접한 노리개가 쉽지 못할 듯하니 그 때는 겨울에는 두꺼운 옥노리개를 차고 경첩하고 약한 노리개만 차지 않으면 된다. 도병은 때에 맞추어 차되 공작석은 고도(깨끼)와 자적 저고리에 차고, 산호와 자마노는 자적 저고리외에는 다 차고, 밀라는 옥색과 자적 저고리에 차려 하면 차되 국기일에는 긴히 사용할 수 있다. 옥 도병 · 수정 붕어도병은 고도와 겹적삼에 찬다. 조롱춤치는 자적 저고리에만 찬다. 세줄노리개는 탄일 · 정초문안과 동지문안에 사용한다.”
향갑은 향을 담은 갑이며, 향낭은 향을 넣은 주머니이고, 발향은 향을 둥글게 비벼서 토막 토막 잘라서 구슬발과 같이 실에 꿰어 향 자체를 그대로 패용함으로써 장신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는 장신구와 구급약의 역할을 더한 것으로 실용성이 있는 장신구라 할 수 있다.
향갑의 특징은 상하에 작은 고리가 있어 매듭의 상하단을 따로 맺고 향갑 속으로는 다회 끈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하단부가 개폐식으로 되어 있다. 향낭은 주로 비단종류로 향주머니를 만든 것으로 색깔은 초록색 · 분홍색 · 다홍색 · 옥색 · 유청색 등을 사용하였다.
다음은 경빈 김씨의 『사절복식자장요람』에 나오는 향낭과 주머니에 관한 기록이다. “향낭은 항라 당저고리에서부터 초사 당저고리까지 다 찰 수 있고, 자라줌치는 뉴청은 자적 저고리에 차고, 백색은 춘추동에 다 찬다. 진주낭자는 궁중에서 제일 큰 명절인 탄일과 정초문안에 사용할 수 있다.”
주머니는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나올 정도로 오랜 패용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도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귀부조(貴婦條)에 비단향주머니를 즐겨 찼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 의복에는 주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실용적인 것이 장식화되어 장신구의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주머니는 염랑과 귀주머니가 있다. 염랑은 주머니 모양이 둥근 것을 말하며, 귀주머니는 양옆이 모가 나있는 것을 말한다. 주머니는 주로 비단바탕에 길상무늬의 화려한 수를 놓았다.
여기에는 오색의 술을 달아 그 모양을 더욱 아름답게 하였는데 사용한 천과 색, 부금 여부에 따라 신분의 존비 · 귀천 · 상하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조선 말의 유물로는 진주를 박아 만든 것이 있는데, 왕비가 패용하던 것이다.
이밖에도 바늘을 넣는 바늘집인 침낭이 있었는데, 금속으로 만들거나 비단에 수를 놓아 만들었다. 부녀자들이 항시 사용하는 바늘을 쉽게 찾아 사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패용하기 시작하여 장식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남녀 없이 많이 패용하였던 작은 휴대용 칼이다. 주로 은으로 만들고 장도집에 칠보나 파란으로 장식을 한다. 부녀자들은 장식용으로서만이 아니라 호신용으로 정절의 상징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장도는 노리개로 차는 것은 패도(佩刀)라고 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낭도(囊刀)라고 하였다. 장도에는 젓가락이 함께 달린 것이 많은데, 휴대하면서 젓가락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음식으로 독을 분별하기도 했다. 소재는 백옥 · 금 · 은으로 만들었고, 형태는 원통형 · 을자형 · 네모형 · 팔각형 등이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고사통(故事通)』에서 “지금은 구습(舊習)이 되었거니와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도는 형체와 패용법이 순전히 몽고풍임이 분명하다.”고 하여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시대 이후부터 계속되어 내려 온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단추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옷에는 원삼 같은 예복에 사용하였던 것이나 개화기 이후 저고리나 여름철 적삼에도 간편함을 쫓아 달게 되었다. 예장용에 사용하던 것은 금 · 은 · 옥석으로 만든 단추가 있었고, 일반용으로는 끈으로 만든 맺은 단추가 있다.
예장용 단추는 나비 · 박쥐 · 국화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본따기도 하였고, 네모진 것에는 각종 문양을 새기기도 하였다. 『궁중발기』에 나타난 단추는 “적의 단추, 직금 원삼 단추, 자적 장삼 단추, 다홍원앙 노의 단추” 등이 있다.
개화기 이후에는 서양복이 들어오게 되고 합리적인 의생활을 강조하여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장신구인 노리개 · 향낭 · 침낭 등의 장신구는 점차 사용이 줄어들었고 성장할 때 노리개 정도가 사용되었다.
상류층에서는 서양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장신구 또한 양산이나 장갑 같은 서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반인은 한복을 입으면서 서양식 장신구를 함께 사용하는 양상을 띠었다.
1910년대 배화여고에서 내외용 쓰개치마 대용으로 검정 우산을 사용하면서 일반인에게도 검정우산이 유행되어 이렇게 시작된 우산(양산)의 유행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15년 상류사회 여성에게서 카플린과 카노체(canotier)모자가 유행하였다. 방한용이던 토시는 1930년대 장갑이 등장하면서 자연히 사라졌다. 1924년경부터 숄이 유행하였는데, 이때는 온몸에 두르는 것이 유행하였다.
1925년 『신여성』이라는 잡지에는 짧은치마, 양산, 하이힐이 유행한 것을 풍자한 만화가 있다. 이어 1927년 풍자화에 보면 핸드백, 양산, 부채 숄이 유행하였다. 1930년대는 모자가 유행하였고 핸드백이 유행함에 따라 노인층에서만 주머니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1930년대에는 레이스와 여우목도리, 파라솔이 매우 유행하였다.
해방 후 1960년대 핸드백, 목걸이, 브로치, 귀고리, 파라솔 등의 다양한 장신구 유행하여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와 재료가 장신구에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