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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하(鄭秉夏)

근대사인물

 개항기 밀양부사, 내장원장, 농상공부협판 등을 역임한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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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개항기 밀양부사, 내장원장, 농상공부협판 등을 역임한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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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중인(中人) 출신이다.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자는 자화(子華)이며, 호는 남고(南皐)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881년(고종 18)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권고에 따라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낼 때, 통상사무아문(通商事務衙門) 관리로 광산·조폐·제철·피혁 등에 관련된 기계의 구입을 위해 대판(大阪)에 파견되었다. 그 뒤 1886년 주사(主事)에서 사관으로, 1889년 협판(協辦)으로 승진하였다.
고종이 외국사정을 즐겨 들었기 때문에 별입시(別入侍)라 하여 일본이나 중국에 다녀온 관리들로 하여금 궁중에 수시로 출입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포함되어 대외관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당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견제하려던 미국공사 폴크(Foulk, G. C)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김양묵(金良默) 등과 함께 청나라로부터 독립하려는 자주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박정양(朴定陽)이 주미공사로 부임하여 위안스카이가 강요한 이른바 삼단(三端)을 무시하는 일이 일어나자, 고종의 명령에 따라 위안스카이를 방문하여 경위를 밝히고, 청나라 공사를 먼저 방문해야 한다는 조건을 철회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대외관계에서 주로 활동하며 다른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였고, 전환국과 광무국에 관여하면서 국고를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888년 밀양부사로 부임하기 전 신병으로 경기도 안산에 있던 집에서 한동안 요양하였다. 1894년경까지 밀양부사로 재임하면서, 나라가 상업으로 자강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동양과 서양의 농학을 종합한 『농정촬요(農政撮要)』를 편찬하였으며, 낙동강의 둑을 막아 농토를 넓혔다.
1890년 전운사를 겸임하였고, 이운사(利運社)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30여만 냥에 이르는 미납된 세금을 거둬들였고, 옛 향약을 토대로 「밀주장정(密州章程)」이라는 향약을 만들었다. 이때 극락전(極樂殿)이라는 불교사찰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1894년 7월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 당시 농상아문(農商衙門) 협판으로 기용되었으며, 영남총무(嶺南總務)로 부세와 조운을 맡았다. 다음해 내장원장(內藏院長)과 농상공부(農商工部) 협판을 겸임하였고, 친미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을 대신하여 서리가 되었다. 당시 친일파로 변신하였으나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받아 왕실재정을 맡았다.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나던 당시 일본 낭인들이 궁궐 안으로 침입하였을 때, 민비에게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짓 보고하였으며, 민비폐비를 극청하는 조칙(詔勅)을 썼다.
그리고 유길준(兪吉濬) 등이 고종에게 단발을 시범보이도록 강요하였을 때, 고종으로부터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명령을 받아 수행하였다.
아관파천 후 역적으로 몰려 이완용(李完用)의 심복인 총순(總巡) 소흥문(蘇興文)에게 경무청 문앞 돌다리 위에서 피살되었고, 종로에 버려진 시신을 군중들이 돌로 치고 사지를 찢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907년 쇄신도화(刷新導和)라는 명분으로 죄를 벗게 해주었으며,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장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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