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의성 출신. 미국 공군의 신분으로 광복군의 군사교육을 담당하였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6·10만세운동에 적극 가담, 시위에 앞장섰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신학과에서 수학, 1937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수학하는 동안 한인애국단체인 동지회와 교민회를 조직, 활동하였다. 1942년 3월부터는 워싱턴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책임자인 이승만(李承晩) 보좌관으로 활약하였다.
이 때 임병직(林炳稷)·장기영(張基永) 등과 함께 근무하면서 『구미위원주보』의 편집·발송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중국대륙에서 군사행동을 일으킬 독립군지도자 이범석(李範奭)을 미국무성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항일전에 참전할 결심을 하고, 1943년 6월 미공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1944년 공군소위로 임관, 같은 해 5월 중국·버마·인도 전투구 항공대에 배속되어 항일전을 준비하였다.
1945년 1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쿤밍[昆明]에 도착, 제14항공대에서 근무하던 중, 미육군성으로부터 광복군의 실제전력을 조사,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사젠트(Sargent, C. B.)소령과 함께 임시정부요인들을 만났다.
그리하여 김구(金九)·조소앙(趙素昻)·엄항섭(嚴恒燮)·신익희(申翼熙) 등과 긴밀한 상의 끝에 광복군 제1·2지대를 각각 방문하고 정확한 실태를 조사하였다.
이어 미전략정보처 산하 한미합작으로 유격대를 조직, 훈련하라는 미국방성의 지시를 받고 이순용(李淳鎔)과 함께 주로 광복군의 통신교육을 담당하였다.
1945년 8월 17일 이범석과 같이 시안[西安]에서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였다가 일본군의 적대행위로 다시 산둥성[山東省]으로 돌아갔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