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봄 셋째형 정의은( 조선공산당 당원), 누나 정봉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해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하였다.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였다. 1936년 남경에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 · 박건웅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에도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延安)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陝甘寧分會),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華北朝鮮革命靑年學校)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여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에 종묘제례악과 연례악 등의 궁중음악 악보가 무단 반출되었는데, 정율성이 이 자료를 확보하여 가지고 있다가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야 그의 아내 딩쉐쑹(丁雪松, 정설송)이 한국 정부에 반환하였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가 1976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연안에 있을 때 작곡한, 「연안송가(延安頌歌)」와 「팔로군행진곡(八路軍行進曲)」(이후 「중국인민해방군(中國人民解放軍)」 군가로 바뀌어 불렸다) 외에,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