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대래(大來). 서울 출신. 정선교(鄭善敎)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61년 부교리로서 진전작헌례(眞殿酌獻禮) 때 집례(執禮)를 맡아 포상받고 가자(加資 : 품계를 올려 줌)되었다. 1864년(고종 1) 우부승지를 거쳐 이조참의·남양부사를 지냈다. 1869년 사간원대사간이 된 뒤 몇 차례 대사간을 중임하였다.
1871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 1874년 경기도관찰사로 외직을 맡았다. 그 해 7월, 경기도는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역인데도 동북 지방의 경우 군대는 명목일 뿐 제대로 편성되지 못하였으니 군민(軍民)을 막론하고 건장하고 활과 총에 능한 사람을 선발, 군사력을 갖추자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같은 해 왕명으로 황해도관찰사 민태호(閔台鎬)와 서로 자리를 바꾸어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황해도관찰사로 재직중이던 1876년, 암행어사 김윤식(金允植)이 서계를 올려 정태호의 가혹한 가렴 주구를 고발하고, 과거의 모참자(冒參者) 40여 명으로부터 수뢰하여 축재한 사실을 논척하며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에 관찰사에서 해임되고 탐학한 재물은 모두 형조에서 징수하였으며,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 뒤 1879년 풀려났다가 이듬해 부평에서 풀려났다. 1882년 다시 관직에 복구되어 이 해 말 예방승지가 되었으며, 1884년 이조참판을 지냈고 충주목사의 외직도 역임하였다가, 1886년 강원도관찰사에 등용되었다.
강원도관찰사 재직 때는 흉년으로 도내의 민심이 흉흉하고 세납물을 바치기 어렵다고 하여 대납(代納)을 요구하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중용되어 1890년 호조판서에 이어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