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미중(美仲), 호는 지당(止堂)·옥호자(玉壺子). 정낙(鄭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석기(鄭碩基)이고, 아버지는 목사 정무(鄭堥)이며, 어머니는 윤우태(尹遇泰)의 딸이다.
1735년(영조 11)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42년 경상도도사 시절 진휼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선발되어 경상도의 양곡을 중앙으로 운반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감진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와의 의견상충으로 삭직되었다.
이듬해 사관(史官)으로 다시 기용되고, 1744년 조정에서 『속대전』을 찬수할 때 왕의 특명으로 찬집랑(纂輯郎)에 보임되어 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후 정언·장령을 역임하고 1747년 의주부윤으로 나갔으며, 좌부승지에 이어 1763년 병조참의에 오르고 대사간을 지냈다.
독서를 좋아하였고 문예·글씨에도 능하였는데, 조구명(趙龜命)이 그의 글을 읽고 “『소동파집(蘇東坡集)』에 실려도 손색이 없겠다.”라고 찬탄하였고, 경연(經筵)에서도 재량있는 말로 왕의 칭찬을 많이 받았으며, 어제(御製)의 편제(篇題)와 홍화문(弘化門)의 액(額)을 썼다. 저서로는 『지당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