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남 ()

난중잡록
난중잡록
고전산문
인물
조선시대 『난중잡록』, 『속잡록』 등을 저술한 의병장.
이칭
선술(善述)
산서(山西), 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
이칭
산서병옹(山西病翁), 산서처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0년(선조 3)
사망 연도
1641년(인조 19)
본관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
정의
조선시대 『난중잡록』, 『속잡록』 등을 저술한 의병장.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 전라북도 남원 출생. 아버지는 사직 조벽(趙璧)이며, 어머니는 남원 양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 양육됐으나 기상은 활달했다. 1579년(선조 12) 10세에 유인옥(柳仁沃)에게 입문해 글을 써 남을 놀라게 했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8세에는 조헌(趙憲)의 문하로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군문에 들어가려 했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1598년(선조 31) 29세에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의 왜군을 무찔렀다.

1608년(선조 41) 39세에는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1614년(광해군 6) 45세에는 삼장(三場)에 합격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1623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했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장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학사(三學士)의 심양(瀋陽) 순절소식에 충의를 읊기도 하였다. 사후 주포서원(周浦書院)에 향사됐다.

13세 때인 1582년(선조 15)에서 1610년(광해군 2)까지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난중잡록(亂中雜錄)』4권 2책이 있다. 『속잡록(續雜錄)』4권 2책과 더불어 의병활동의 생생한 기술과 명·청과의 외교활동의 객관적 기술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사료(史料)로 참고 되었다.

참고문헌

『대동야승(大東野乘)』
『난중잡록(亂中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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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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