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신인 설화 ( )

구비문학
작품
신라 시대의 법사인 명랑(明朗)의 행적에 관한 설화.
정의
신라 시대의 법사인 명랑(明朗)의 행적에 관한 설화.
개설

『삼국유사』 권5 신주편(神呪篇)에 실려 있다. 명랑은 진덕여왕 1년(647)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신인종(神印宗)이라는 새 종파를 창설하였다. 또 명랑은 신인종의 원찰인 금광사(金光寺)를 창건하고 법력으로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으며, 그 뒤 고려조에도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이 종파의 뒤를 이었다.

내용

명랑의 자는 국육(國育)이며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인데 법승랑(法乘郎)이라고도 한다. 명랑은 세 아들 중 막내아들이다.

명랑은 뛰어난 재질로 당나라에 들어가 도를 닦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 밑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여 황금 천 냥을 보시 받고, 땅 밑으로 몰래 나와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삼고 보시 받은 황금으로 불상과 전각을 건조하였으니 이것이 곧 금광사이다.

당나라의 고종이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문무왕은 이를 두려워하여 명랑에게 청하여 비법을 써서 이를 물리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신인종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경주의 원원사(遠源寺)도 안혜(安惠)·낭융(郎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 사대덕(四大德)과 김유신(金庾信) 등이 원을 같이하여 세운 신인종의 사찰이다.

또한, 고려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울 때 해적들이 발호하므로, 이에 안혜와 낭융의 후예인 광학·대연 등 두 승에게 청하여 법을 만들어 해적을 진압하게 하였는데 이들도 모두 명랑의 계통이다. 그러므로 법사를 합하고 위로 인도의 명승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현성사를 세워 신인종파의 근저로 삼았다.

또 돌백사(堗白寺)의 기록을 보면, 경주호장 거천(巨川)의 어머니는 아지녀(阿之女)이고,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이며, 그 어머니인 적리녀(積利女)의 아들은 광학대덕(廣學大德)과 대연삼중(大緣三重)이다. 그 형제 두 사람이 모두 신인종에 귀의하여 고려 태조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임금의 행차를 따라 분향 수도하였으므로, 태조는 그 노고를 포상하여 두 사람의 부모의 기일보(忌日寶)로 돌백사에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일연(一然)은 「명랑신인」의 기록을 통하여 대덕·명랑의 이적과 기사를 들어 그 행적을 기리고, 신인종파의 계보를 더듬어 사기(寺記)를 중심으로 이를 체계화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집필자
소재영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