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제1에 수록되어 있다. 호국설화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신라 유리왕 때의 일이다.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서울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방어하였으나 힘이 달렸다. 이 때 문득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전세를 돌려놓았는데, 적이 퇴각한 뒤에 보니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어 그제야 선왕의 음공(陰功)임을 알았다. 그래서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혜공왕 15년 4월 어느 날,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죽현릉 쪽으로 불어 가고 있었다. 얼마 뒤 무덤이 진동하며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변함없는데,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군신이 저의 공렬(功烈)을 잊음이라.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쓰지 않겠습니다.” 이에 미추왕이 대의가 더욱 중함을 들어 설득하였더니 김유신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경신(金敬臣)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어 대신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김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나라를 지킨 미추왕의 음덕을 사모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고, 서열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 불렀다고 한다.
이 설화는 『삼국사기』의 김유신조에도 나오나 이처럼 자세하지는 않다. 신라에서는 많은 호국신 · 호국룡을 모시고 있었는데 이 설화도 그러한 풍토에서 나온 것이다.
김유신이 찾아가 읍소할 상대 왕릉으로 미추왕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고 말하며(태종무열왕이나 문무왕이면 이해가 가지만) 모태(募泰) 원종(原宗)이라 이름한 법흥왕릉의 투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 연구도 있다.
김유신가와 왕실과의 군신 관계는 원종왕과의 사이에서 맺어졌으며, 법흥왕의 원종과 미추왕의 상사음으로 인한 혼동의 증거로 『삼국유사』의 미추왕 · 김유신의 관계가 설화화된 것으로 추단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