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회경(會慶). 호는 구당(鷗堂). 조기진(趙基晉)의 아들이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위이다.
1865년(고종 2) 직장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대교가 되었다. 1866년 승정원주서가 되었으며, 1869년 부호군으로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71년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다음해 제릉·후릉친제시(齊陵厚陵親祭時)에 예방승지로 참여하여 가자(加資 : 품계를 올려 줌)되었다. 1874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1880년 도총부도총관에 특별히 발탁되었다가 이어 형조판서를 지냈다.
다음해에는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1882년 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임오군란으로 민비(閔妃)의 장례를 지낼 때 종척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외직에 나갔다. 광주유수 재직시 흉년이 들어 민정(民情)이 불안하자 환곡을 정퇴(停退)하는 등 진휼(賑恤)에 힘썼다.
1883년 다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다가 1889년 예조판서에 취임하였다. 1895년 판의금부사에 특별히 발탁되었고, 1897년 중추원1등의관에 임명되었으며, 칙임관 2등이 주어졌다.
1898년 대원군의 부인 여흥대부인(驪興大夫人)의 광중명정(壙中銘旌) 서사관(書寫官)과 대원군의 명정 서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903년에는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로 칙임관 2등이 주어졌고, 1905년에 홍문관학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1907년 규장각학사 겸 시강원일강관(侍講院日講官)으로 활동하였으나, 만년에는 정계와 관계를 단절하고 은거하였다. 1910년 국권강탈 이후 일본정부에 의하여 남작이 주어졌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