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극선 ()

야곡집(권7) / 삼관기
야곡집(권7) / 삼관기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헌부지평, 선공감첨정,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유제(有諸)
야곡(冶谷)
시호
문목(文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5년(선조 28)
사망 연도
1658년(효종 9)
본관
한양(漢陽)
주요 관직
선공감첨정|장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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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사헌부지평, 선공감첨정,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 조곤(趙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흥무(趙興武)이고, 아버지는 조경진(趙景璡)이다.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진사 이치림(李致霖)의 딸이다. 박지계(朴知誡)·조익(趙翼)의 문인으로, 처음에는 이명준(李命俊)을 사사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3년(인조 1) 학행으로 추천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어 종부시주부·공조좌랑을 역임하고 한때 은거하였다. 그 뒤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호조정랑을 역임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1636년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시폐(時弊)와 자강지책(自强之策)을 간곡히 진언하였다.

면천군수로 나가서도 국방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호란 당시는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호란의 소식을 듣고 혼자 달려왔으나 천안에서 길이 막혀 부모와 함께 해도(海島)로 피난하였다. 뒤에 순창군수·형조정랑·사어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1648년에 온양군수로 나갔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 조익의 강력한 추천으로 성균사업(成均司業)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강화부사·순창군수·익산군수·공조정랑 등에 임명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다.

165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나가 곧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고, 이듬해 다시 장령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병들어 죽었다. 효행과 학행으로 이름이 났으며, 효종행장에도 효종이 그의 학행을 흠모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 『야곡집』 10권과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등이 있다. 성리학과 예설에 밝은 학자로 뒤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과 덕산(德山)의 회암서원(晦庵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명재집(明齋集)』
『포저집(浦渚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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