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 · 학정(鶴汀). 충청북도 충주 출생.
학문이 속성하여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역학 · 천문 · 지리 · 복서 · 음률 ·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32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분감척의(憤感斥議)하여 화산(華山) 선유동(仙遊洞)에 들어가 종로(終老)의 계(計)를 삼고자 하였다. 다시 상산(商山 : 지금의 상주)의 무지산(無知山)에 들어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전심하였다.
그 뒤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을 비롯한 세자 · 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어 인조가 그를 왕호(往護)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불응하여 3년 동안 보은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다시 인조의 권유에 의하여 나가 심양에서 대군들을 잘 받들었다. 이 때 세자 왕호에 오르는 감격의 정회를 읊은 가사 「봉산곡(鳳山曲)」을 지었으며, 특히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환국시 임금의 소명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낙동강상 옥주봉(玉柱峯) 아래에 복거하였다. 1798년(정조 22) 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상주상의사(尙義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