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한일래(韓一來)·한위송(韓韋松)·한영일(韓英日)·천병일(千炳日)·방자원(方子遠)·위사원(韋思源). 충청남도 부여 출생.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10월 상하이[上海]에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 등 정당단체 대표 9명이 한자리에 모여 전선통일 문제를 협의할 때 박건웅(朴建雄)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각 단체의 전선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협의기구로 같은 해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되었다. 이 때 9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통일전선운동에 관여하였다.
1932년 10월 의열단의 김원봉(金元鳳)이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에서 정치조(政治組)의 교관으로 군사간부를 양성했으며, 학생들을 모집하는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의열단·한국독립당 등 5개 정당·단체가 통일을 이루어 결성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서 간부로 활약하였다. 창당 시에는 중앙검사위원이었고, 이후에는 화남지부(華南支部) 총책임을 맡았다.
1937년 12월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에서 비서로 선출되었다. 1938년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을 때, 그 활동을 지휘감독하는 지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38년 4월부터는 조선민족전선연맹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 발행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조선의용대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의 중국어판 주편위원(主編委員)을 맡았다. 충칭[重慶]에서 폐병으로 죽었다.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