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병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조선의용대통신』의 중국어판 주편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한일래(韓一來), 한위송(韓韋松), 한영일(韓英日), 천병일(千炳日), 방자원(方子遠), 위사원(韋思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6년(고종 33)
사망 연도
1943년
출생지
충청남도 부여
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조선의용대통신』의 중국어판 주편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이명은 한일래(韓一來)·한위송(韓韋松)·한영일(韓英日)·천병일(千炳日)·방자원(方子遠)·위사원(韋思源). 충청남도 부여 출생.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10월 상하이[上海]에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 등 정당단체 대표 9명이 한자리에 모여 전선통일 문제를 협의할 때 박건웅(朴建雄)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각 단체의 전선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협의기구로 같은 해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되었다. 이 때 9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통일전선운동에 관여하였다.

1932년 10월 의열단의 김원봉(金元鳳)이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에서 정치조(政治組)의 교관으로 군사간부를 양성했으며, 학생들을 모집하는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의열단·한국독립당 등 5개 정당·단체가 통일을 이루어 결성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서 간부로 활약하였다. 창당 시에는 중앙검사위원이었고, 이후에는 화남지부(華南支部) 총책임을 맡았다.

1937년 12월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에서 비서로 선출되었다. 1938년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을 때, 그 활동을 지휘감독하는 지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38년 4월부터는 조선민족전선연맹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 발행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조선의용대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의 중국어판 주편위원(主編委員)을 맡았다. 충칭[重慶]에서 폐병으로 죽었다.

상훈과 추모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한상도, 문학과 지성사, 1994)
『한국민족운동: 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974)
「조선 의용대연구」(김영범,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8)
집필자
한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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