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진 ()

목차
관련 정보
강화 초지진 외부 서북쪽 성곽 전경
강화 초지진 외부 서북쪽 성곽 전경
근대사
유적
문화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조선후기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진지. 국방유적 · 고지명. 사적.
목차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조선후기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진지. 국방유적 · 고지명. 사적.
개설

197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1716년(숙종 42) 강화 해안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적지이기도 하다.

내용

『여지도서(輿地圖書)』『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주1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군관(軍官)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주2 210인을 배치했고, 진선(鎭船) 3척을 두었다. 초지돈(草芝墩) · 장자평돈(長者坪墩) · 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 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 · 화약고 · 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875년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와 40㎜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의 2인치 정도의 주3만 있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다.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내 고장의 전통』역사와 문화의 향기(경기도, 1981)
『근대한미교섭사』(김원모, 홍성사, 1979)
『경기도향토교육자료지』문화재편(인천교육대학기전문화연구소, 1976)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6)
『한국사』최근세편(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여러 진에서 마병과 보병을 통솔하던 종사품 무관 벼슬.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나라의 목장에서 마소를 먹이던 사람.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만든 대형 화포. 지름 30cm쯤 되는 쇠나 돌로 만든 둥근 탄알을 넣어 쏘았다. 우리말샘

집필자
강진갑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