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탁이(卓爾). 호는 행원(杏園)·행우(杏雨). 최준철(崔濬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계종(崔繼宗)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최변(崔忭)이며, 어머니는 별좌(別坐) 우성훈(禹成勳)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89년 음보(蔭補)로 능참봉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따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고, 그곳에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부친상으로 출사하지 못하다가 1595년 봉교, 다음해 형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이 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병조정랑으로 세자시강원사서를 겸하였다. 이어 지평·문학·필선·정언·헌납·장령을 역임하고, 1599년 권신을 탄핵한 일에 연좌되어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07년 사면되어 순창군수·담양부사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우부승지에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이도(吏道)를 바로잡았다. 어려서는 성품이 난폭하여 동네의 싸움을 도맡아 하였으나, 형 최홍한(崔弘僩)의 충고로 학문을 닦게 되었다.
그는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서리(胥吏)들의 부정을 간과하지 않았고, 당시 권세가인 유영경(柳永慶)의 전횡을 시로써 풍자하여 그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순창군수로 있을 때에는 권세가들의 침탈로 양정(良丁)이 줄어들고 관부의 재정이 궁핍하여짐을 보고 법으로써 이를 억제하였다. 특히, 그는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선유(先儒)들의 모든 예서(禮書) 주설(註說)을 재고증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