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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崔萬理)

언어·문자인물

 조선전기 직제학, 강원도관찰사, 집현전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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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전기 직제학, 강원도관찰사, 집현전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고려시대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崔沖)의 12대손이며 하(荷)의 아들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1419년(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집현전박사로 임명되었다. 그 뒤 집현전학사를 거쳐 그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개괄적인 관력을 보면, 1427년 3월 교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그 해 7월에 응교에 올랐으며, 1437년 직제학, 1438년 부제학, 1439년 강원도관찰사, 1440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1444년에 훈민정음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문제로 즉일 친국을 받고 다음날 석방, 복직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영역닫기영역열기활동사항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 그는 집현전의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불교배척 상소가 6회, 첨사원(詹事院) 설치반대상소가 3회로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 진사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한 것과 사직상소 및 한글반대상소가 있다.
불교배척상소의 대부분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慶讚會)의 혁파를 청하는 것이었고, 첨사원 설치를 반대한 상소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섭정시키려 하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그는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궁중의 의사청(議事廳)에 최항(崔恒) 이하 집현전 소장학사와 동궁·진평대군(晋平大君) 등을 참가시켜 원나라의 웅충(熊忠)이 엮은 『고금운회거요 古今韻會擧要』의 자음을 한글로 달아 일대 자음의 개변운동을 하려 하였다.
세종은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체계 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집현전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한글반대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이 된다.
즉, 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친국내용을 보면, “내가 만일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한 것을 보면 최만리 등의 상소는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은 뒤에 『동국정운』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홍무정운 洪武正韻』이 실패작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동국정운』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고금운회거요』 번역사업의 반대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이숭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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