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의정서는 1904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교환된 의정서이다.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여 양국 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였고 주한러시아공사는 서울을 떠났다. 일본공사 하야시는 일본군 제12사단장과 함께 한일 간의 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여,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가 조인되었다. 이로써 일제는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했고 통신기관도 군용으로 강제 접수했으며 철도부설권과 연안어업권을 강탈해 갔다.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채 자행한 제국주의적 침탈이었다.
러 · 일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 양국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 · 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러 · 일 양국은 이 해 2월 6일 국교를 단절, 2월 8일 여순(旅順)항에서 처음 포성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2월 9일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고, 2월 10일에는 정식으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듯 순식간에 국토가 무서운 전쟁터로 변하여, 한국 정부로서는 국외중립을 견지할 방도가 거의 없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서울 입성과 동시에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李址鎔)을 통해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일본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송두리째 무시하여 버렸다. 이러한 전화 속에 민심이 흉흉해진 2월 12일, 주한러시아공사 파블로브(Pavlow,A.)가 공사관원과 함께 러시아 병사 80명의 호위 아래 서울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일본공사 하야시는 일본군 제12사단장 이노우에(井上)와 함께 공수(攻守) · 조일(助日)을 앞세운 한일 간의 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여 왔다. 그러는 한편, 반일, 친로파였던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李容翊)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그 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보부상의 중심 인물 길영수(吉永洙), 육군참장 이학균(李學均), 육군참령 현상건(玄尙建) 등을 감시 조처하였다.
이리하여 일제의 강박 아래 드디어 2월 23일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가 이지용과 하야시 사이에 체결되어 조인된다.
이 전문(全文) 6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 · 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 · 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이 의정서의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제2조와 제3조에서 비록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 보전을 보증한다고 하였으나, 그 뒤의 경과에서 명백해졌듯이 실효성 없는 규정일 뿐이었다.
제1 · 4 · 5 · 6조는 어느 것이나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제국주의적 침략 수법이 은연중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치적 · 군사적 · 외교적인 면에 있어서 한국에 대한 식민지 경영을 합리화하려는 제1보에 다르지 않았다.
이 치욕적인 의정서가 같은 해 3월 8일자 관보(官報)에 실리자 온 국민의 비난과 반대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았다. 이는 언론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정부의 처사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드디어는 의정서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동 참사관(參事官)인 통역 구완희(具完喜)를 매국노로 규탄, 그들의 집에 폭탄이 던지는 등의 극한 행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그 대책으로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 이토(伊藤博文)를 한일친선 특파대신에 임명하였다. 그 해 3월 17일 내한한 이토는,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며 체류 10일간 한편으론 무력으로 위협하고 한편으론 무마로써 이를 진정시켰다. 이에 한국 정부는 답례로서 이지용을 보빙사(報聘使)로 일본에 파송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기초작업이 끝나자 청일전쟁 후 일본과 대치하던 러시아 세력은 서울 정계에서 사라지고, 일본에 아부하는 이론과 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 결과 일제는 의정서에 의거해 군사행동과 수용 · 강점을 제멋대로 감행,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였고, 3월 말에는 한국의 통신 기관도 군용으로 강제로 접수하였다.
대한제국은 5월 18일자 조칙으로 한 · 러 간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언하고, 러시아인이나 러시아회사에 넘겨주었던 모든 권리도 취소하였다. 또한 경부(京釜) · 경의(京義) 철도부설권을 군용으로 일제에게 제공하였다.
같은 해 6월 4일에는 「한일양국인민어로구역(韓日兩國人民漁撈區域)에 관한 조약」을 체결해 충청 · 황해 · 평안 3도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넘겨주었다.